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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1

심야의 탐험 이것의 정체는 마지막에. 색감이 좋아서 순서를 거슬러 일단 올린다. 오랜만에 가회 갤러리에 갔다. 가는 길인 북촌에 차 한 대 안 다니길래 대충 예상은 했지만 아예 텅텅 비어있을 줄은 몰랐다. 점원 분들도 내 음료를 서빙해 준 뒤로는 야외석에 나가 자기들끼리 한가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어 결국 내가 가게를 본 꼴이 됐다. 오늘 가회 갤러리의 전시물은 모형 기차와 돌 하우스(Doll House).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가회 갤러리는 사장님과 점원들이 엄청나게 친절해서 딱히 그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 명이 가서 고작 차 한 잔씩 시켰을 뿐인데 구경하는 우리를 따라 다니며 설명해 주랴, 돋보기 가져다 주랴, 가격 알려주랴 바쁘면서도 우 리보다 훨씬 즐거워 보였다. 아무.. 더보기
대관람차  태풍이 몰고 온 비가 내려도 전자기기 가득한 방 안에 있으면 연신 땀이 난다. 학교 뒷산이 지척에 보이는 위치라 문만 열어두면 산바람이 내려온다. 산동네 사는 기쁨 만끽하면 좋겠지마는 가내에서는 대체로 정글소년 모구리처럼 벌거벗 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고 있는 나는 오가는 다른 방 사람들에게 굳이 보일 모습은 아니라 생각해서 그저 창문만 열어 둔다. 바람보다 벌레가 더 많이 들어오는 꼴이라 마음의 위로만 될 뿐이다. 와중에 먼먼 나라로 떠난 지인에게 반가운 메일을 받았다. 평온한 안부와 함께 온 사진은 석별의 선물로 내가 건네었 던 대관람차. 오르골 기능이 있어 플라이 미 투 더 문을 들을 수 있다고 하여 기꺼이 샀던 것인데 막상 택배로 받아보 니 레퀴엠 비슷한 클래식이 나왔다. 처연한 멜로디 탓에 먼.. 더보기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이 정도로 끝낼 수 있다면 아무튼 평균 내서 괜찮은 하루가 아니었겠나, 생각한다. 더보기
화석 늦은 귀가 중에, 작은 동산 하나 정도가 날아간 집 앞 공사판에서 트리케라톱스의 화석같은 중장비를 보았다. 한편으 로 흉물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쓸쓸해 보이는, 기묘한 느낌의 피사체라 땀으로 끈적해진 몸을 움직여 찍어 보았다. 더보기
개천에서 용 찾기 매 주 보지는 않고, 이따금 구미가 당기는 제목이 걸리면 찾아 보는 . '개천에서 용 찾기' 편은 지난 봄 에 다운받아 놓고 별 내용 있겠나 싶어 미뤄두었던 것인데, 지난 주인 7월 29일 방송된 '김제동-박경철-안철수' 2편 을 보고 흥을 가라앉히지 못해 다시 꺼내어 시청했다. 같은 프로그램이라 무의식적으로 재생시키긴 했지만, 1편에 이 어 점차 공고한 삼각편대를 이루어가는 김박안 트리오의 활약을 보고 난 뒤라 얼마나 재미있겠나 싶었는데, 별 내용 없더라도 일기를 쓰고 싶어질 정도로 흥미롭게 봤다. 인트로 장면. 개천이라도 여러 개 있을텐데 일부러 청계천에서 찍질 않나, 개천에서 난 용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 개하면서 각하도 슬쩍 끼워넣질 않나, 아무튼 분발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렇지 않아도 무더운 .. 더보기
본 꼼쁠레아노, 까멜로.  낙타가 나오는 영화를 찍고 있다. 아무데나 침을 찍찍 뱉는 고약한 성격에, 낙타 주제에 가끔 보면 껌을 씹고 있질 않 나, 출신도 사막 횡단 등의 대업(大業)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잔심부름 용이었던 듯 하지만, 그래도 내 영화에선 당 당한 주인공. 애초의 사업 계획서는 아이폰으로 찍은 단편이었는데 들어간 제작비 뽑으려면 아이맥스에 걸어야 하게 생겼다. 아무튼, 새로 그린 그림이니 언젠가 '화첩' 카테고리에도 올릴 것이지마는 오늘이 마침 낙타의 생일이라 일기 장에 먼저 올린다. 생일 축하해, 낙타야. 더보기
토요 미스테리 극장 놀토가 없던 90년대 학생들의 고된 토요일의 끝에 큰 위안이 되어주던 . 배우 전무송 씨가 특유 의 음산하고 지친 목소리로 진행을 보았던 일종의 재연 프로그램이다. 전무송 씨는 영화 에서도 나레이터 역할 의 배역을 맡은 바 있는데, 아마도 감독이 이 프로그램을 보고 캐스팅한 것이 아닌가 싶다. 1회부터 60회까지 모아놓 은 화일을 누가 올려놓았길래, 언젠가 보겠거니 하고 다운을 받아두었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에어컨이 나오는 집에서 며칠을 자다가 다시 신촌 방으로 돌아왔다. 내 돈 주고 살았던 방 중에 서는 마음 속 왕좌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 없는 연희동 귀족집이었는데, 18'c 바람일랑은 추억에 묻고 선풍기 옆에 앉 아 있자니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단 말인가 하는 존재론적 의문이 든다. 양로원 .. 더보기
다녀왔습니다. - 혹독했던 지난 겨울에 전기 장판을 낙타의 안장처럼 두르고 마침내 살아남았던 것처럼, 인천에서 가지고 온 대나무 자리를 침대 위에 깔아두고는 잠시라도 떠나지 않는다. 함께 비비적거려 새끼를 낳을 수만 있다면 지금쯤 대나무 자리 부족에서 완장 하나 정도는 너끈히 달었을 것. 아무튼, 하루가 그러하니 오로지 하는 일이라곤 떠나지 않는 것 뿐이라 게시를 할 사진도 없고 따로 정리할 생각도 없어 또 잡스런 일기를 쓰게 됐다. - 예비군 후기. 혹서기라고 설렁설렁 해 주기는 했지만, 설렁설렁 하더라도 혹서기였기 때문에 탈진을 면할 수는 없었 다. 더워서 잠깐 흐르는 맑은 땀 말고, 몸의 양분 다 빨아먹은 진득한 땀이 군복을 모두 적셔 개고 오리고 열심히 먹어 대었던 여름나기 음식들이 말짱 헛수고 됐다. 그렇게.. 더보기
예비군 5년차  재학 중일 때에는 대학원생도 대학생으로 분류되어 1년에 8시간, 하루에 걸쳐 예비군 훈련을 받고 돌아오면 그만이었 다. 같은 학부, 같은 과끼리 배치되기 때문에, 서로 잘 몰랐던 동기나 선배와도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하루짜리 소울 메이트가 되어 돌아오기도 했었다. 5년차인 올 해, 재학중이어야만 참여할 수 있는 학교 프로젝트들도 끝나고 해서 기 본 등록금 아껴보겠다고 휴학을 했더니만 득달같이 일반 예비군 훈련이 나왔다. 4시간, 6시간, 8시간으로 각기 다른 3 일에 걸쳐 참가를 해야 하는데, 8시간 짜리를 두 차례 안 갔더니만 인천의 본가로 상근 아저씨가 와서 그러다간 벌금 맞는다고, 내일 모레인 목요일에는 꼭 나오라며 으르렁 거리고 갔다고 한다. 귀찮아 하는 내게 몇 차례고 전화를 걸어 확인을 .. 더보기
힙합에 이 한 몸 바치리, for real 다짐했었던 십 년 전의 사진. 이제의 나는 중산층에 편입되고자 미드 템포의 재즈를 듣는다. 거울을 볼 때마다 특히 입꼬리가 점점 내려가 나이들어 보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던 차에, 김정운 박사의 강의 가운 데 '한국 남자는 웃지를 않아서 볼이 일찍 처진다'는 말을 듣고 좀 웃고 다녀야 되나 어쩌나 고민이 됐다. 아버지의 생 신을 축하하기 위해 들른 인천에서, 방의 서랍을 뒤적거리다 발견한 십 년 전 공연의 팜플렛. 심술맞게 생긴 건 나이 탓이 아니었구나, 하고 살던 대로 살기로 했다. 안 웃기면 안 웃고 말지 뭘. (큰 상관 없지만) 오늘 있었던 작은 일화 하나. 상경하기 위해 삼화고속엘 탔는데, 건너편 좌석 쪽에 앉은 여성이 아주 큰 소리로 무슨무슨 보이프렌드라는 가사가 끊임없이 나오는, 정말 끊임없이.. 더보기
7월 13일 - 주소를 알려준 사람은 많아야 열댓 명이고, 이전에 비해 딱히 더 재미있는 내용을 쓰는 것도 아닌데 조회수가 차츰 올라가더니 마침내 백 근처를 맴돌게 되었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매일 일기를 써야 되나 이거, 남들이 재미있어 할만한 내용 써야 되나 이거, 같은 간사한 생각이 들어 오랜만에 사진 한 장 없이 에랏 근황 적는다. 에랏 근황의 미덕은 문단 앞에 - 하나 붙였다는 핑계 대고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 글들을 마음대로 써지르는 것. 안팔리 는 과자만 잔뜩 든 선물상자 되겠다. - 시험이 끝난 상원과 종각에서 만났다. 술을 못 마시는 친구와 만나는 것이긴 하지만, 설마 진짜로 스타벅스 한 가운 데에 앉아 네 시간을 떠들 줄은 몰랐다. 어깨에 근력 잔뜩 들어간 연애 업계의 연금술사님께.. 더보기
<오래된 아이>, 7월 10일 대학로 열린극장 작년 이맘때쯤 아주 즐겁게 관람했던 공포연극 의 극단인, 극단 '옆집누나'의 2011년 공포연극, . 이 극단은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공포연극을 상연하는 모양인데, 꽤 재미있게 보았던 의 연출이 이번 작품에서 도 연출을 맡고 있길래 기대하며 예매했다. 작은 입장권에 인쇄된 포스터만으로도 섬뜩했던 에 이어, 포스터 의 귀신이 아이유와 함께 지친 30대의 삶에 활력을 가져다 주는 카라의 한승연 양과 닮아 느낌이 좋았다. 먼저, 스토리.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매 해 열리는 축제 때마다 목사의 비밀스런 주재 아래 구성원들이 식인의 의례를 갖는 마을이 있다. 15년 전, 목사의 딸인 '인후'가 이 장면을 목격한 뒤로 홀연히 사라지게 된다. 그 뒤로 실의에 빠진 목사의 아내 앞에 돈이나 그 외의 이 익을 .. 더보기
검은 고양이 한 마리 데려왔수에다. 생애 첫 기타. 인디 IA - 20D. 일명 아이유 기타. 동방의 등불 아이유 님께서 연주하시는 핑크색 기타와 동일 모델이다. 얼마 남지 않은 어떤 특별한 날의 몰래 이벤트를 위하여 택배 배송 시간조차 아껴 연습을 하고자 낙원 상가를 찾아 직 접 이고지고 왔지마는, 생색 내길 좋아하는 입방정 때문에 몽땅 들통났다. 이제는 그저 취미생활. 보급형이라 이거 붙이고 저거 붙여도 십만 원 중반대를 넘지 않았다. 정분 난 이와 갈대밭 뒹굴듯 망가뜨릴 각오와 함 께 격정적으로 다뤄가며 배워보기로 하고, 여행용 기타는 여행을 떠나게 될 때에 가격과 상관없이 가장 갖고 싶은 것 을 사자고 마음먹었다. 변신 로봇의 발칸 포처럼 생긴 기타 가방을 메면 으쓱하기도 하고 조금 창피하기도 한 마음 등이 복잡하게 들지 않을 까 .. 더보기
개와 오리의 시간 아버지의 친목회인 청수회(淸水會)에서는 1년에 몇 차례 개를 잡는다. 다른 때는 일정한 기약이 없지만 복이 가까워 오는 여름에는 매 해 반드시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 마련이라 올해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인천으로부터 하루 내려와서 맛있는 것 좀 먹고 가라는 연락이 왔다. 보름 여를 기다리고 달뜬 마음으로 오늘 오후에 내려가겠노라고 엄마에게 전 화를 하다가, 아직 개 잡을 때는 되지 않았고 날이 덥고 하니 가족끼리 오리전골을 먹기로 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큰아들로서 이따금 있는 가족 행사를 기뻐해야 마땅한 것이고 오리 또한 인천에서 소문난 집의 별미를 시킬 것임은 알고 있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침울하기 그지없다. 아무튼 인천에 다녀오겠다. 더보기
기타를 찾아보자 벼락처럼 공돈이 생긴다면야 선릉 역까지 뛰어가 기타 바를 살 기세이지만, 일단은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봐야 하기도 하고 공부하기가 싫기도 하고 해서 다른 기타를 찾아보았다. 물론 보급형 통기타가 구입과 관리에 있어 가장 편하나 방에서 연습하기엔 소리가 다소 크지 않을까 걱정되고, 악기를 사고 연습하는 자체가 당장의 소일거리보다는 언젠가 떠날 긴 배낭여행의 동반자를 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여행용 기타가 적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모자란 실력 을 포장하기엔 신기한 악기 모양으로 일단 듣는 이를 홀려두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는 꾀돌이 속셈도 있었다. 넘버 원 컨텐더인 마틴의 백패커. 기타 바는 안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이 기타는 수 년 전에 실물을 보고 이미 마음을 준 바 있었다. 신품으로 구입하면 40만.. 더보기
기타를 사자 기타리스트 이병우 님이 직접 제작하고 판매까지 하신다는 기타 바(guitar bar). 이름도 매끈하고 모양도 스트랩 하나 까지 마음에 쏙 들어 검색을 해 보았더니 오십오만 원. 우느님께서 잇속 챙기려고 만든 것이 아닐 것임은 마땅히 짐작 하겠지마는 액수 앞에서는 그저 한숨만 나온다. 세금 환급받은 것도 있고 해서 삼십만 원 근처쯤 하면 큰 마음 먹고 사 려고 했는데. 악세사리 모두 빼고 기타만 삼십만 원 근처라도 삼십은 삼십이라고 자신을 속일 각오도 되어 있었는데. 작년 겨울 인생의 첫 현악기인 우쿨렐레를 사던 때에, 이것저것 만지면서 기웃거리자 사장님은 조만간 비싼 우쿨렐레 를 하나 더 사게 될테고 결국엔 기타도 사게 될테니 처음엔 그저 초보용으로 시작하시라는 충고를 해 주었다. 당시엔 누가 보태 달.. 더보기
모서리 귀신 대학교에 입학한 뒤 처음으로 만났던 여자친구는 지방 출신으로 이대 근처의 하숙집에 혼자 살고 있었다.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고 자라난 양가의 규수이자 소녀들로부터 순결서약을 받아내는 특정 종교의 독실한 신도였던 그녀는, 내가 인사불성으로 만취하였거나 뜻하지 않게 인천행 시외버스의 막차를 놓친 때 등이 아니면 좀처럼 방엘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중과 남고를 거치면서 여학생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던 나는 딱히 뭘 한다기보다 여자친구의 방에 들어가 놀 고 있는 그 자체가 무척 즐거웠기 때문에 거듭 출입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아무리 신입생의 즐거운 3월이라지 만 떡이 되도록 마셔댈 술자리가 매일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운수 회사가 파업을 하여 시외 버스가 일찍 끊겼다는 핑 계도 열 번을 넘길 수는 .. 더보기
<두 여자>, 6월 24일 대학로 라이프 시어터. 내 인생 첫 소셜커머스 상품은 공포 연극 티켓. 사랑티켓보다 싸길래 기뻐 날뛰며 관람하고 돌아왔다. 이제 와 말씀드리지만 작가와 바람둥이라는 이중 인격을 감쪽같이 연기한 (2002),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윤회의 영겁성이라는 화두를 던진 연출 데뷔작 (2003) 등 나는 공포 연극에 혼을 바쳤던 연극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춘기의 사촌 동생을 데리고 공포 연극을 보러 갔다가 그녀석이 기말고사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께 꾸지람을 들은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제 버릇 개 못주고 이토 준지처럼 겅중겅중거리며 또 보러 다 녀왔다. 이번 작품은 포스터만으로는 역대 가장 기대되는 연극 중 하나였던 . 공포 연극은 본래 웃음(혹은 드라마)과 공포라는 '이완 - 긴장'의 반복 구조에 .. 더보기
오늘의 깨달음 며칠 심상치 않다 싶더니, 서울에 폭염주의보가 내렸다고 한다. 시원해질 도리는 없다 싶어 선인의 가르침을 실천해 보려 어묵탕을 사다가 선물받았던 일본주를 데워 함께 먹어보았다.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한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데 머리통에서 쉴새 없이 땀이 나 머리카락을 흠뻑 적시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공부가 풀리지 않을 때 이 따금 습자 연습을 하지만 실력이 형편 없어 올리지는 못하였는데, 오늘은 성질이 나 에랏 하고 올려본다. 획마다 에랏 이 묻어난다. 장마는 언제 오는 거야. 더보기
여름아 부탁해 체질이 그리하여, 턱선이 나오도록 살이 빠져도 땀은 잘도 난다. 춘추 양복 걸쳐 입고 삼성역으로 결혼식 사회를 보러 다녀오니 겉옷이고 속옷이고 젖지 않은 곳이 없다. 작년부터 살고 있는 방에는 겨울에 해가 전혀 들지 않았다. 거북이 등껍질마냥 전기장판 두르고 누워서 그나마 여름엔 시원하겠거니 마음의 위안을 삼았는데, 웬걸. 하루 중 다니는 곳들 가운데 가장 덥다. 에어컨 달아달라면 방값을 올려받겠지. 피지배/피고용/피소유의 소셜 스탠스란 유사 이래 면면히 피곤한 법이다. 낮에 비싼 스테이크를 먹었기도 했고 물 떠다 놓으면 삽시간에 컵에 방울이 맺히도록 덥기도 해서 배 가 고파도 밥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나마 지난 봄 이고지고 해서 인천에서 가지고 올라온 열무 김치를 열어보니 미간에 뱀이 열 마리는 .. 더보기
선생님께 현경이 형이 맡은 한문 수업의 기말고사 시험 감독을 들어갔다가, 한 학생으로부터 형에게 전해 달라는 편지를 받았 다. 내 제자도 아닌데 괜스리 뭉클. 며칠새 부쩍 더워진 날씨에 밥 먹기도 귀찮아하며 빈둥빈둥거리고 있었는데, 얼른 박사 과정에 진학하여 수업을 맡아야겠다는 굳은 마음 새삼 든다. 작년에 가르쳤던 학생에게서 학생들이 사기에는 조금 비싼 커피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마음이 귀여워 아끼는 마음이 들어서 나름으로 애지중지하며 머리맡의 책장에 두고 이따금 쳐다보곤 하다가, 과음한 다음 날의 아침에 손잡히는대 로 무심코 마셔버렸다. 반쯤 들이켰을 때에야 그 커피인 것을 알아차렸고 정신이 깨면 크게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 번 배출하기 시작한 소변은 끊기 어려운 이치와 같아 모두 마셔버릴 수.. 더보기
몰랐던 마실 기다리던 저녁 약속이 몇 시간을 앞두고 무산되어, 홧김에 마트로 장 보러 가는 길에 버스를 잘못 타고 말았다. 타고 있던 버스의 차고지 한 정거장 앞에서 내린 것이라 다른 버스도 딱히 빨리 올 것 같지 않았고, 도로 위 표지판의 이름 들도 수색교니 DMC니 하는 낯익은 것들이어서 목적지까지 걸어 보기로 했다. 가다 보니 강북 살면서도 딱히 들어가 볼 일 없었던 난지 공원과 월드컵 공원이 눈에 띄어, 이곳을 통해서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의 내비게이션 기능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나이니, 이미 그쯤엔 목적지에 가거나 말거나 별 상관없는 심정이 되었던 것도 같다. 평일이라지만 얼추 퇴근 시간 근처였는데도 그 넓은 공원에서 마주친 사람이라곤 손 꼽을 정도였다. 일부 러 시계를 봐야 지.. 더보기
6월 11일, 홍대 노천 해지면 산들바람 불고, 휘적대고 다니며 놀기 딱 좋은 한 때다. 살이 빠진 뒤로 자주 짓고 있는 멍청한 표정이 불시에 찍힌 사진에 그대로 드러났다. 더보기
야밤에 애 아버지인 친구가 만취하여서는 전화를 걸어왔다. 삼성역 한복판이라는데, 삼성역 한복판에서 이렇게 소리를 지를 수가 없을 것인데 하고 갸우뚱할 정도로 괴성을 질러댔다. 익명으로 처리할 해당 애 아범은 십여년 전에도 폭우가 쏟아지는 경포대에서 흰자가 칠 할 이상이 되도록 술을 처먹고 울부짖던 바 있는 이이다. 빗소리가 없었어도 반은 못 알아들었을 포효의 대강은, 넌 왜 미팅이나 헌팅 때마다 내가 마 음에 둔 여자만 매처럼 채 가느냐 뭐 그런 내용이었다. 진정성은 있으나 개그 타율은 부진한 그를 위해 열 번 웃길 것 도 여덟 번 웃기고, 욕망은 가득하나 표현에 머뭇대는 그를 위해 재색이 좀 부족한 분을 택하여 먼저 모시고 나가던 나 로서는 그리 듣기 편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여 말리고 말리다가 나도 술을 .. 더보기
유월이 가네 마츠 다카코 주연의 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에는 '시작의 3월'이라든지 '만개한 5월' 과 같이 이미 이미지가 선점되어 있는 달들을 일부러 피해 신선한 이름을 잘도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단지 일본 의 개학이 4월이기 때문이었다. 5월에 결혼하는 일본인 친구에게 오월의 신부가 된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가, 일본인 에게는 유월의 신부가 가장 좋은 것인데 식장을 잡기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오월에 하는 것이라는 핀잔을 들었다. 왜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아래인 나라가 더 늦게 개학하고 더 더울 때 결혼식을 하는 것일까. 마음은 아직도 보름이나 됐을까 싶던 봄을 마중하고 오는 길인데 날은 벌써 겨울 이불을 빨아 널어도 한 나절이면 마를 듯 하여 그 따위의 생각 이나 일삼는 새, 쓰레빠 직.. 더보기
참외 밥을 다 먹고 또 과일을 먹으면 설거지가 두 번이라, 나는 대체로 한 끼를 통째로 과일로 채워 먹는다. 덕분에 몇 번 안 사다 먹은 토마토가 지긋지긋해질 무렵 다행히도 물좋은 참외가 나와줬다. 깎아먹는 불편함은 있지만 맛은 토마토보 다 낫다고 생각한다. 무심코 찍은 사진인데 아르침볼도의 그림처럼 나왔다. 예전에 그의 그림들을 보았을 때에는 그 시대에 어떻게 이런 것들을 상상해 냈을까 감탄할 뿐이었지만 막상 내가 엇비슷한 모양을 사진으로 찍고 보니 뭐야, 어디서 봤구먼, 하고 멋대로 실망하게 된다. 더보기
5월 28일, 남산예술원, 경은 양의 결혼식. 요사이 야근이 많아서 고생이 심하다던 경은 양. 얼굴은 오랜만에 보는 것인데 정말로 살이 많이 빠져서 깜짝 놀랐다. 건강에는 별 탈이 없는지 걱정이 됐지만 아무튼 덕분에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도 훌륭히 소화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인 생만사 새옹지마. 남산예술원. 차가 없었더라면 찾아가는데 애를 먹었을 것 같았지만, 하객들 고생시켜 가면서라도 결혼식을 올리고 싶 은 곳이었다. 날이 맑은 한편으로 더웠는데 나무가 많아 쉽게 그늘을 찾을 수 있었다. 5월부터 9월 사이에 결혼을 하게 되는 이들에겐 추천해 줄 만한 곳인 것 같다. 본인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들으면서도 마냥 시크한 경은 양. 그 매력에 하객들도 푹 빠졌다. 아무튼 이제는 강 건너의 사람. 안녕, 난 이 쪽에서 조금만 더 놀다 갈게요 하고 손 흔들어 .. 더보기
대호야 어쩌냐 노무현씨 T T 쓰고 있는 휴대폰에는 절대로 지우지 않는 문자가 30여 통 있다. 대부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문자들이지만, 2009년 5월 23일에 받은 한 통만은 지금도 이따금 울컥한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며 그 문자를 보았을 때에는, 검 찰로부터 소환조사를 받고 있던 참이라 불리한 결과가 나왔나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노무현이 죽은지 2년이 지났다. 고작 두 번째이지만, 헤어진 애인의 생일처럼, 아침에 눈을 뜨며 그 날이구나, 하고 생 각이 난다. 그간 살아오며 해 온 노력과 지금 갖고 있는 것을 비교해 보면, 불행하거나 불우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각별히 누구의 덕을 보았다거나 운이 좋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런 내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위해 무언가 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더보기
춤추는 만돌린 얼마 전 가회동에 갔던 날, 약속보다 일찍 도착한 참에 오랜만에 낙원상가엘 들어가 보았다. 주인보다 익숙한 손놀림 으로 기타를 매만지는 말총머리 형들, 상기된 얼굴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젊은 밴드들을 보면서 생기가 느껴져 아 주 즐거웠다. 개인적으로 찾고 있었던 것은 만돌린. 베니스의 곤돌라 등과 같이, 이탈리아에 대한 피상적 동경 탓도 있 었지만 우쿨렐레나 밴조보다 음색이 풍부하고 깊다고 여겨져 언젠가는 두어 곡쯤 마스터하고 싶은 악기였다. 보급형 이 25-35만원으로 각오하던 것보다는 괜찮은 값이라고 생각해 악기상 분께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았는데, 현악기들 중 각별히 매력적인 음색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에서는 악보를 구하기가 어려워 기타를 잘 치시는 분들이 스 스로 기타 악보를 변형하여 .. 더보기
5월 22일, 알렌관. 순희의 결혼식. 요새는 찍은 사진의 화질이 매우 좋지 않다. 카메라의 어딘가를 만진 모양인데 정확히 알 수가 없어 매번 후보정의 수 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아무튼, 오늘 낮 학교 알렌관에서 있었던 순희의 결혼식. 야외에서 치루어졌는데 날씨가 좋 아 다행이었다. 30대를 눈앞에 두고 남들 다 하는 결혼 우리는 언제 하나 밤 늦도록 함께 맥주를 기울이던 것이 어제 같은데. 청첩장을 받는다고 만났던 며칠 전 순희는 다 운명이니 때를 기다리라는 대륙적 위로인지 충고인지를 해 주었다. 축하하는 마음 칠 푼에 남겨진 쓸쓸함이 서 푼. 이전에는 신촌의 이웃 주민이었는데, 남편이 인천 분이라 (인천의) 논현동에 차린 신 방 덕분에 이제는 같은 인천 시민. 다음 번 약속은 구월동이다. 순희를 구월동에서 만날 줄이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