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11

모서리 귀신







대학교에 입학한 뒤 처음으로 만났던 여자친구는 지방 출신으로 이대 근처의 하숙집에 혼자 살고 있었다.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고 자라난 양가의 규수이자 소녀들로부터 순결서약을 받아내는 특정 종교의 독실한 신도였던 그녀는, 내가
 
인사불성으로 만취하였거나 뜻하지 않게 인천행 시외버스의 막차를 놓친 때 등이 아니면 좀처럼 방엘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중과 남고를 거치면서 여학생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던 나는 딱히 뭘 한다기보다 여자친구의 방에 들어가 놀

고 있는 그 자체가 무척 즐거웠기 때문에 거듭 출입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아무리 신입생의 즐거운 3월이라지

만 떡이 되도록 마셔댈 술자리가 매일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운수 회사가 파업을 하여 시외 버스가 일찍 끊겼다는 핑

계도 열 번을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궁구를 거듭하던 내가 찾아낸 신의 한 수는 귀신 이야기였다.


학교의 선배였던 여자친구와 개인적으로 처음 친해지게 된 계기도, 도서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녀가 손님
 
없는 비오는 날 혼자 만화책을 보다가 무서운 내용에 겁을 먹고 얼마 전 친해졌던 신입생인 내게 전화를 걸어온 때 부

터였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신촌 인근에서 유랑하고 있던 나는 뜨끈한 먹거리들을 사 들고 은평구 어딘가의 그 도서
 
대여점을 찾아갔고, 그로부터 마침내 만남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전화로 얘기하던 게 이 책인가요, 하고 들춰본 만화

는 귀신 책이라기보다는 귀신 소재가 나오는 순정 만화에 가까웠다.


귀신 이야기라면 질색팔색하며 처음부터 귀를 틀어막는 타입이라 여자친구는 공포특급에 나올 법한 90년대의 귀신 이

야기들조차 끝까지 아는 것이 적었다.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 등의 엘리베이터 귀신 이야기들을 해 준 뒤로는 밤 늦

도록 공부해야 하는 시험 기간의 매일마다 문과대와 도서관에서 계단을 통해 데리고 내려와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

니, 밤이 으슥해지도록 방에서 TV를 보거나 고스톱을 치며 즐겁게 놀다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척하며 빠르게 귀신 이

야기를 들려주고는 차가 끊기겠군, 이제 가봐야겠다, 하며 일어서면 여자친구는 울상을 하고 소매를 잡아끌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러 이야기들 가운데 여자친구가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내가 만들어낸 캐릭터인 '모서리 귀신'이었다. 만들어낸 '스

토리'가 아니라 '캐릭터'였다고 말하는 이유는, 여자친구가 어지간하면 다 겁을 먹었던 터라 이야기에 별 공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서 죽었느니 어떻게 죽었느니 등은 몽창 다 빼고, 그저 '방 모서리에는 일찍 죽은 아이의 귀신이
 
벌거벗은 채로 쭈그려 앉아 있는데, 항상 사람 등 뒤쪽의 모서리로만 옮겨 다니지만 어쩌다 그 아이를 보게 되면 죽는

다', 라는 설정만 있었다. 그 정도만 해 두어도 여자친구는 엇, 너 등 뒤쪽에 모서리 귀신! 하고 소리를 지르면 주저앉아
 
울곤 했다. 어느 날은 인천에 있는데 전화가 와서, 모서리 귀신이 등 뒤에 있을까봐 뱅글뱅글 돌다가 지금은 한쪽 모서

리에 앉아 있어, 이젠 안 무섭지, 같은 소릴 하길래, 그럼 둘이 같은 데 앉아있는 거 아냐?, 라고 말했다가 서울행 시외

버스 막차를 타고 상경해야만 했다.


일기를 쓰려고 모서리 귀신을 그린 건 아니다. 비오는 새벽에 논문을 읽고 있자니 싱숭생숭해서 여백에 낙서를 하고
 
있었는데, 손이 제멋대로 가서 쭈그린 아이를 그리길래 그 일이 생각난 것 뿐이다. 그이는 그 해 나와 헤어지고 떠난
 
어학연수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만났고 몇 년 전 결혼을 했다. 그 뒤로는 소식을 들을 일이 없었지만, 직업을 갖기보단

현모양처가 되고 싶어했던 성정을 떠올려 보면 아마 지금쯤은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다 한 번쯤 아이에게 귀신

이야기를 들려주게 될 때, 모서리 귀신을 떠올리는 일이 있을까. 그렇다면 행복하겠다. 




'일기장 >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타를 찾아보자  (0) 2011.07.01
기타를 사자  (0) 2011.06.30
<두 여자>, 6월 24일 대학로 라이프 시어터.  (0) 2011.06.24
오늘의 깨달음  (0) 2011.06.20
여름아 부탁해  (0) 2011.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