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째의 밤부터 경남 지역에는 소나기가 예고되어 있었다. 종주를 떠나기 전 확인했을 때 30-40%였던 강수 확률은 어느새 80-100%로 치솟았다. 아니나 다를까 일곱 시 언저리가 되자 해는 이미 지고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사진은 그나마 밝기를 보정한 것이다. 어느새인가 길과 강, 산과 하늘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자전거길에 환하게 밝혀져 있는 보조등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용객도 별로 없는데 예산절감을 위해 비 오는 밤 같은 때에는 다 꺼버리라는 명령이 있었다면 여기에서 멈추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남도지사 홍준표 씨가 결정했는지 부산시장 허태열 씨가 결정했는지, 아무튼 평생 감사해할 일 없을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도 일단 감사는 하긴 한다. 하기사 4대강 자전거 도로 전체가 전임 대통령의 업적이시지.

 

 

 

 

 

 

 

 

55km를 달려 양산 물문화관 인증센터에 도착. 이때 이미 온몸은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남은 것은 마지막 포인트인 '낙동강하굿둑 인증센터' 까지의 35km 뿐. 본래는 이틀째의 일정을 여기에서 멈추고 양산시에서 숙박을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몸이 이왕 젖고 보니 고생은 오늘로 끝낸다는 오기가 들어 다시 빗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 십 키로나 이십 키로쯤 더 가고, 내일은 푹 자고 일어나서 맛난 것 먹고 샤워하고 땀 한 방울 안 흘린 채로 뽀송뽀송 결승점을 통과해야지. 팬티와 양말 젖은 짜증을 이 악물고 참아가며 달렸다. 인생이 계획대로 될 리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멀리로 대도시 부산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찾은 부산. 사실 부산인지 뭔지도 모르겠고 진짜 부산이라 해도 아무 상관없는 상태이긴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끝내 20km를 더 달려 부산 지하철 2호선의 사상역까지 갔다. 사상역은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의 지역구이다. 그래서 간 건 아니고, 부산 동의대에 임용이 되어 서울을 떠난 뒤로 얼굴을 보지 못했던 상석이 형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내 이동거리와 다음 날의 일정, 형의 이동거리 등을 감안해 중간으로 잡은 것이다. 단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도 이렇게 한가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만, 깜빡거리는 배터리와 미끄러운 길, 그리고 초가을의 폭우 속에서 달렸던 마지막 20km 때에는 언뜻언뜻 군 시절이 생각날 정도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목적지인 사상역까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어볼 때 똑바로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덜덜 떨면서 사...사상...사상... 하는 말 밖에 안 나왔다.

 

사상역은 부산의 중심지 중 하나인 만큼 유흥시설과 숙박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모텔에 자전거를 세우고 보니 가방과 안장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앗 참. 때늦은 인사이지만. 우당탕 넘어지고 빗속을 달려가도 고장나지 않는 자전거를 만들어주신 알톤 사에 감사드립니다.  

어...얼마... 라고 물어 방 값을 지불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모텔 입구에 공짜 커피머신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코코아를 한 잔 뽑았다. 얼마나 뜨거운지 가늠하려 입술만 적셨다고 생각했는데 마른 땅에 비 내리듯 코코아는 몸으로 죽 하고 들어가 버렸다.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십여분 쯤 샤워기 아래 죽은 듯 누워 있자 정신이 좀 돌아왔다. 젖은 옷과 마스크, 장갑을 몽땅 쌓아두고 샴푸를 뿌려 발로 팍팍 밟아가며 초벌 빨래를 했다. 툴툴 털어 널고 있자니 사상역에 도착했다는 상석이 형의 전화가 왔다. 

 

이 기사는 내 지인으로서 블로그를 찾는 이들도 읽겠지만 자전거 여행 자체로만 검색해서 들어오는 독자들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적인 이야기는 따로 길게 적지 않으려 한다. 무척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이자 형이고, 아주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여전히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어서 아주 기쁜 만남이었다는 것만 적어두고 넘어가려 한다.

 

자전거 여행 중 그 지역에 거주하는 지인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앞으로는 종종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하나에만 너무 몰두하면 외곬수가 되기 쉽다. 산과 강 사이로 열 시간이고 열두 시간이고 자전거만 타고 있다보면 오늘 몇 km, 남은 거리 몇 km, 시간이 얼마, 상처와 체력은 얼마 따위의 생각에 사로잡히기 일쑤이다. 그런데 새 옷으로 갈아입고 모텔의 슬리퍼를 끌고서는 도심의 번화가를 걷고 있자니 방금 전까지 맞서 전쟁을 치루던 폭우도 산뜻한 가을 소식에 지나지 않았다. 내게 좌절과 실패를 가져다 줄 것 같았던 무릎과 허벅지도 아야 아파, 라는 정도의 느낌만이 들었다. 게다가 반가운 사람을 만나 맥주를 마시니 삼십 분 전의 고난은 생동감 있는 화제거리가 되었다.    

 

즐겁게 마시고 방으로 돌아왔다. 처음 들어갔을 때엔 너무 피곤해서 몰랐는데 내가 묵은 곳은 아주 잘 꾸며진 러브 호텔이었다. 곳곳에 성인 용품이 비치되어 있고 바닥 빼고는 전부 거울이 붙어 있어서 기웃기웃거리다가 잤다.

 

 

 

 

 

 

 

 

2박 3일의 마지막 날 오전 8시.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 머무른 곳인 사상역에서 을숙도까지는 고작 10km이다. 자전거길 권장 속도인 20km로 가더라도 30분이면 도착한다. 그렇다면 부산의 명물 돼지국밥이라도 먹으면서 기다리다가 비 그치면 떠나볼까.

 

 

 

 

 

 

 

 

엥 오후 되어도 꽝. 밤새 옷과 신발 말렸건만. 어차피 젖을 거라면 아침부터 푹 젖고 서울에 후딱 올라갈란다. 부산은 다음에 때때옷 입고 KTX 타고 놀러올란다.

 

 

 

 

 

 

 

 

출발 전 완전무장. 물론 폭우 앞엔 장사 없었다.

 

 

 

 

 

 

 

 

비 오는 아침이라 광장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도착하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박수 쳐주는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는데. 그저 멀쩡한 날씨여서, 캔음료 한 잔 마시며 종주에서 있었던 일들 회상하고 조금 멋쩍더라도 과장된 인증 사진 몇 장 찍으면 충분했는데.

 

 

 

 

 

 

 

 

그냥 가긴 아쉬워서 아이폰의 방수 기능을 믿으며 마지막 인증 사진 한 장 찍었다.

 

 

 

 

 

 

 

 

에잉.

 

 

 

 

 

 

 

 

무인 인증센터 바로 앞의 낙동강 문화관으로 들어가니 휑뎅그렁한 로비에 안내센터가 하나 있었고 거기에 공무원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이 자전거길은 사실 결혼을 약속했던 이와 헤어지게 된 뒤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시작했던 것이라 즐거운 출발은 아니었다. 과정에서도 피곤한 일이 몇 차례나 있었다. 이번의 마무리도 끝매무새를 잘 짓지 못하는 습관을 고치려고 작심했던 것이지 희망찬 기대를 품고 집에서 나섰던 것은 아니다. 그런 만큼 국토종주 인증을 받고 금빛 스티커를 붙이고 나면 피로와 감동, 회한이 섞여 눈물이라도 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현실은 춥고 배고픈 결말과 인증 직원의 효울적이고 사무적인 처리 때문에 눈물이 날 뻔 했다. 뭐 이래 이거, 하고. 저마다의 호흡과 속도로 달리게 되어있다고 멋진 척 한 터라 욕도 못 하겠고.

 

나와서도 그냥 가면 되나 하고 멋적게 서 있었지만. 서 있으면 뭘 어쩔 것인가, 비나 더 맞지. 주춤주춤 돌아가는데 낙동강 하굿둑 위로 강바람은 귓등에서 귀신 소리를 내고, 반대편서 달려오는 25톤 트럭들은 내 키보다 높은 물따귀를 날려대었다.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물따귀를 얻어맞은 몸에서는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심한 냄새가 났다.

 

동서울로 올라가는 시외버스는 금세 있었다. 한 시간 반쯤 기다리면 만 원이 싼 일반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땀 냄새에 물 냄새에 차라리 남들과 떨어져 앉는 것이 예의다 싶어 바로 있는 우등을 끊었다. 경남을 벗어나니 비구름은 없었다. 대구, 구미, 상주, 충주, 양평. 그 동안 자전거로 달렸던 도시의 이름이 하나씩 창밖으로 지나갔다. 동서울터미널에는 햇볕이 따가웠다. 새로 이사한 집까지는 이십 분 정도면 충분하다. 사흘 전과 마찬가지로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나도 자전거를 몰고 조용히 돌아왔다. 빨래를 돌리고 밥을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나, 일기를 썼다. 안녕.

 

 

 

 

 

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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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 달 반쯤 후에는 국토해양부에서 국토종주 메달과 상장을 보내온다. 수령하는 것도 일기로 써서 올리도록 하겠다.

    2015.09.18 15:5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김종우

    참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연이 있는 자전거 종주였네요...
    어쩐지 자라섬 등에서 약간 후회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져서 의아해 했었습니다...
    (아니시라면 제멋대로 감정이입 죄송합니다)
    아무튼 국토종주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6.05.20 07:2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꼼꼼이 읽고 글마다 댓글도 달아주시고. 고맙습니다. 올 여름에는 제주를 한 바퀴 돌아볼까 계획만 세우고 있는데, 이렇게 잘 봐 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얼른 다녀와서 또 여행기를 쓰고 싶네요. 고맙습니다.

      2016.05.23 18:18 신고 [ ADDR : EDIT/ DEL ]

 

 

 

새재자전거길 다녀온 후기를 쓰고 있는 중 잠시. 오늘자 한겨레일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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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예산낭비 사례…정부, 내년 조기 종료 방침
시간당 10대 미만 구간 태반…서·남해쪽 사업 포기

‘엠비(MB)표’ 자전거도로 사업이 대폭 축소돼 내년에 조기 종료된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4대강 사업과 함께 전국에 물길을 따라 ‘ㅁ자형’으로 자전거도로를 조성하려던 사업인데, 지난해 감사원 감사에서 대표적인 ‘예산 낭비’ 사례로 지적되면서 ‘ㄱ자형’으로 끝나게 됐다.

안전행정부는 2일 “전국을 국가자전거도로로 연결하는 ‘자전거 인프라 구축사업’이 내년 예산 250억원을 끝으로 마무리된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가 주력했던 자전거 인프라 구축사업은 2010~2019년 사업비 1조200억원(국비 5100억원)을 들여 한반도와 제주도에 총길이 2285㎞의 국가자전거도로를 새로 만드는 계획이다. 동해·남해·서해의 삼면과 남한강·북한강을 따라 ㅁ자 모양의 순환망을 깔고, 제주도에도 섬을 일주·종단하는 자전거도로망을 구축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뒤 지난해 10월 감사원 감사에서 대표적인 예산 낭비 사업으로 지목돼 사업에 제동이 걸렸다. 당시 감사 결과 이미 건설된 14개 구간 가운데 10개 구간은 자전거 교통량이 시간당 10대 이하였고, 2개 구간은 0.5~1대만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행부는 예산 당국과 협의를 거쳐 올해부터 사업을 크게 축소해 내년에 조기 종료하기로 결정했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올해부터 2019년까지 국비 2092억원이 투입돼야 하지만, 올해와 내년 2년 동안 500억원 규모로 축소됐다. 이명박 정부가 예산을 편성한 2010~2013년 국가자전거도로에 투입된 국비가 1952억원에 이른다.

사업 조기 종료로 남해와 서해 국가자전거도로는 아예 조성되지 않는다. ㅁ자형 순환망이 아니라 ㄱ자형으로 마무리되는 셈이다. 총길이도 2285㎞에서 1742㎞로 짧아졌다.

안행부 관계자는 “지난해 감사원 감사 뒤 현재 진행 중이거나 수요가 높은 구간만 완성하고 사업을 조기 종료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인프라 구축사업이 끝나는 내년 이후 국가의 자전거 사업은 제도 개선으로 초점을 이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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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4대강자전거길은 지난해 10월에도 감사원으로부터 지적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당시 국토부는 이 지적이

 

'자전거인프라 구축사업'과 ‘국도 자전거도로 구축사업’에 해당하는 것일 뿐 4대강 자전거도로와는 무관한 것이

 

는  해명을 내놓은 바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됐습니다. 2100억 원의 예산이 500억 원 규모로 축소되었다면 현

 

공사나 보수 중인 구간을 마무리하는 선에서 끝나게 되겠네요. 본래의 사업 계획이 완성되면 4대강 자전거길

 

첩 또한 새로운 길이 표기되는 것으로 교체하게 되어있었는데 어쩌면 그대로 갖고 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사의 설명에 따르면 결국 낙동강 하굿둑에서 영산강 하굿둑을 잇는 남해 길, 영산강하굿둑에서 아라서해갑문

 

을 잇는 서해 길이 포기된다는 것이겠죠. 제주의 순환 자전거길은 이미 조성중이기도 하고 다른 길에 비하면 상

 

대적으로 수익성이 보장되기도 할테니 완공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남겨진 500억 중 상당 부분은 여기에 할당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타의 운송 수단을 빌리지 않고 자전거 한 대 만으로 집에서 출발해 국토를 돌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아이디어

 

는 이렇게 무산되었습니다. 자전거길의 이용자로서 아쉽긴 하지만 쓰여진 세금이 많은 국민들에게 편의를 가져

 

다주지 못한다면 당연히 계획이 조정되어야 하겠지요. 또 언젠가 지자체 별로 각기 훌륭한 관광상품을 갖춘다든

 

지 하는 등의 제반 환경 변화가 있으면 그 때 다시 사업타당성을 타진해 볼 수도 있겠구요. 아울러 새로 길이 나

 

지 않는다고 해서 이미 지어진 길들의 매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하니, 남은 길 마저 열심히 달려봐야겠습니

 

다. 하루이틀 사이에 늦여름에서 한가을로 훌쩍 넘어가버려 더욱 추운 느낌이 듭니다만, 동료와 선배 라이더 여

 

러분들도 옷 든든하게 여며입고 즐겁게 달리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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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의 외곽으로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불이 켜진 건물은 문경소방서였다. 나는 조금 기뻤다. 끝내 그

 

거리를 걸어낸 성취감도 있었지만, 마라톤이나 국토종주를 하다가 소방서에 들어가 물 한 잔을 부탁하고 소방대

 

원들의 응원을 받으며 떠나는 오래된 로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망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아시안게임 축

 

구를 보고 있던 소방관들과 의무소방 대원들은 불정역에서부터 걸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물을 떠주네, 바람을 부

 

쳐주네 활발한 수선을 피웠고 문경 시내의 지리를 몇 차례고 거듭 가르쳐주었다. 역시 소방. 멋져.

 

 

 

소방관들이 가르쳐준 핵심정보는 '점촌역을 찾아라'였다. 어느 도시나 시청 인근이 번화하지만 문경시청은 문경

 

외곽에서도 꽤 들어가야 한다. 물론 멀쩡한 자전거라면 금세 가 닿겠지만 밤늦게 문경을 찾는 이라면 조금이라

 

도 거리를 줄이고 싶은 사정이 있을 것이다. 점촌역은 자전거길에서 문경시청보다 훨씬 가깝다. 그리고 인근에

 

저렴한 모텔촌과 유흥가가 있다. 숙박비도 숙박비이지만 늦게까지 여는 유흥가, 이거 중요하다. 서울에만 계속

 

사는 사람들은, 그래도 중국집이랑 닭집은 늦게까지 열겠지, 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방의 중소도

 

시로 내려가면 여덟아홉 시만 넘어가도 여는 가게가 없는 곳이 많다. 문경도 외곽은 그랬다. 하지만 소방관들이

 

가르쳐준대로 소방서에서 직진해 나아가자 멀리로 점차 불빛들이 보였다.  

 

 

 

 

 

 

 

 

 

 

밤의 문경. 문경에 들어서면서 휴대폰의 배터리가 다 되어서 꺼졌다. 덕분에 소방서에서의 즐거운 추억도 사진

 

으로 못 남겼는데, 그런 와중에 만난 아카데미 과학사. 어찌나 반가웠든지 짐을 뒤져서 대용량 배터리를 꺼내어

 

휴대폰을 충전해서까지 찍었다. 아직 살아있었구나, 아카데미 과학사! '문경모형'이라는 정겨운 이름의 간판도

 

눈에 띈다.

 

 

 

 

 

 

 

 

그것도 목 좋은 문경중학교 앞에. 너네 복받은 줄 알고 조립 많이 해라. 온라인 게임 백날 해 봐야 추억 안 돼.

 

 

 

아카데미 과학사, 다음날 일어나서 문경을 떠나기 전에 한 번 다시 가봐야지, 생각했는데 까먹고 말았다. 상주로

 

가는 길 위에서야 떠올리고는 무릎을 쳤다.

 

 

 

 

 

 

 

 

오천 원이라도 싼 곳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찾은 모텔. 내가 간 곳은 '로즈 파크' 모텔이었고 기본료

 

는 삼만 원이었다. 서울처럼 사만 원을 부르는 다른 모텔들보다는 만 원이 쌌지만 싸움과 흥정은 붙이고 보랬다

 

고 사장님께 앵겨보니 오천 원을 더 깎아줬다. 깎은 것이 스스로 장해서, 닭 사먹었다.

 

 

 

이건 갑자기 좀 붕 뜨는 내용이지만, 꼭 쓰고 싶어서 여기에 끼워넣는다. 문경에 들어서서 나는 여러 사람을 붙

 

잡고 질문을 했다. 점촌역의 위치를 물어본 것만 해도 너댓 명이고, 싼 모텔의 위치도 물어보고, 시켜먹을 수 있

 

는 닭집이 있는가도 물어보고, 그런 닭집이 없다고 하여 포장만 해주는 닭집이 있는가도 물어보고, 닭집 근처까

 

지 가서 정확한 위치를 다시 물어보고, 닭집에서 닭 시켜놓고는 옆자리의 사람들에게 문경 시내의 자전거포가

 

있는가도 물어봤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아주 성실한 대답을 들었다. 점촌역의 방향을 가르쳐주고는

 

내가 맞는 길로 가는지 계속해서 지켜보던 수퍼 아줌마, 이 시간에는 배달 닭집이 없다고 대답하고는 '자전거 여

 

행 힘내세요'라고 수줍게 말하던 남중생, 아는 자전거집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일요일인데 가게 여냐고 물

 

어봐주던 편의점 사장님, 그리고 어느 자전거포가 제일 싸고 좋은지에 대해 갑자기 격론을 벌이던 닭집의 청년

 

들. 시간은 열한 시가 넘었다. 불정역에서 출발한지 네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내 땀냄새에 내가 짜증이 날 지

 

경이었고 발바닥은 후끈거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내가 만난 소수의) 문경 사람들에게 감탄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촌사람이라고 돌려서 놀리는 거 아녀!'라고 화내지 말길 바란다. 나는 서울 사람들이 잃어버린,

 

하지만 사람이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무언가를, 그날 밤 당신들에게서 보았다고 생각한다.

 

 

 

 

 

 

 

 

무한도전 재방송만 있으면 어딜 가도 우리집 같다. 

 

 

 

 

 

 

 

 

하하하.

 

 

 

 

 

 

 

 

좋아하는 에피소드라서 예전에 그림도 그렸었지.

 

 

 

 

 

 

 

 

푹 자고 일어났다. 자전거 여행의 숨겨진 공신인 전립선 패드. 덕분에 마음놓고 달린다.

 

 

 

 

 

 

 

 

불의의 사고나 뛰어난 조심성으로 문경을 찾는 분을 위한 또 하나의 꿀팁. 점촌역 인근에는 모텔촌과 유흥가도

 

있지만 자전거포도 있다. 여기저기서 안내를 받은 자전거포들은 모두 모텔촌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것에 반해

 

내가 네이버에 직접 찾아본 이 가게는 점촌역 바로 옆에 있었다.

 

 

 

 

 

 

 

 

일요일도 한다. 오성자전거. 사장님인지 사장님의 아드님인지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분이 가게를 열고 계셨

 

다. 사정을 이야기하자 만 원에 구멍난 튜브를 갈아주었다. 자전거가 안 굴러가면 꼼짝없이 점촌 터미널에서 버

 

스 타고 서울엘 갈 판이니 튜브 교체 비용은 부르는대로 주어야 하는 것인데, 인터넷으로 알아본 평균 비용보다

 

훨씬 쌌다. 거기에 앞바퀴에 바람도 채워주고, 안장과 물받이도 다시 조여주고, 브레이크의 상태도 다시 봐 주었

 

다. 어제에 이어 나는 문경에 홀딱 반했다.

 

 

 

 

 

 

 

 

오성자전거 옆으로는 터널이 있는데, 저 터널을 통과해 잠시 직진하면 다시 새재자전거길에 합류할 수 있다. 새

 

재자전거길을 달리던 사람도 잠시 들러 편하게 수리하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거리이다.

 

 

 

 

 

 

 

수리를 받고 나니 또 쌩쌩 잘 나간다. 슬슬 애증이 쌓인다.

 

 

 

 

 

 

 

 

요렇게. 터널을 빠져나와서 직진하면 강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나서 본래의 목적지 상주로.

 

 

 

 

 

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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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종우

    문경 인심 좋네요~
    또 펑크가 나다니... 그날은 정말 힘드셨겠어요.
    고생하셨고,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2016.05.19 23:2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바람은 시원했다. 사방이 불꺼진 산중이라지만 차도 안 다니는 뻥 뚫린 길에 시간은 고작 저녁 일곱 시. 다음 거

 

점인 상주까지는 31km이니 넉넉 잡고도 아홉 시에는 도착할 판이었다. 상주는 새재자전거길의 종점이자 이 날

 

의 목표지점이기도 했다. 모텔 잡고 샤워 하고 야식 한 끼 먹고 나서 '그것이 알고 싶다' 보다가 자면 되겠네. 나

 

는 신이 났다.

 

 

 

불정역을 뒤로 하고 십 분쯤 달렸을까. 몇 시간 동안 달리면 체력은 분명히 출발할 때보다 떨어져 있지만 타는

 

요령이 생기는 것 같다. 좀 더 적은 힘을 들이고도 속도를 내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느낌을 즐기면

 

서 달리고 있는데.

 

 

 

달각달각. 달각달각.

 

 

 

아뿔싸.

 

 

 

두근두근하며 브레이크를 잡고 안장에서 내려 천천히 뒷바퀴를 바라보니. 처음 만난 날인데 하루에 두 번 찾아

 

와 준 펑크. 뒷바퀴는 이화령 올라가기 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상주에 도착해서 수리를 하겠다는 생

 

각이 안이했던 것일까.

 

 

 

나는 깜깜한 이차로 옆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화령에서는 적어도 보장이 있었다. 일

 

단 해가 밝았고, 지나가는 차도 있었고, 휴게소까지 올라가면 간단한 수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단지 어려운 것은 내 힘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좀 더 심각하다. 일단 불정역으로 돌아가는 것은

 

수가 아니다. 비싼 돈을 주고 자야 하거니와 내일 일어나서 어차피 다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해는 완전히

 

졌다. 자전거도로와 일반도로가 분리되어, 자동차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 어찌할 것인가.  

 

 

 

 

 

 

 

 

일단 스마트폰을 꺼내어, 불정역에서 상주로 가는 노선을 찬찬히 확대해 보았다. 그러자, 자전거길을 쭉 따라가

 

면 시내까지는 들어가지 않지만 문경시의 외곽에 닿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문제는 거리였다. 원래의 목적지인

 

상주까지가 31km다. 가는 길에 있는 문경까지는 얼마가 나올 것인가. 새로 경로를 검색해 보니 약 20km가 나왔

 

다. 거리는 20km. 시간은 일곱 시. 그럼, 걷자. 새재도보길을 걷자.

 

 

 

 

 

 

 

 

이 정도만 되어도 좋았다.

 

 

 

 

 

 

 

 

하지만 20km의 대부분은 이런 길이었다. 도중에 라이트가 방전되면 곤란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주위가 식별

 

가능한 에서는 라이트를 끄고 걸었다. 결국 특별히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청소년이나 노약자에게는

 

정말로 권하고 싶지 않다.

 

 

 

 

 

 

 

 

가는 길에 만난 터널.

 

 

 

 

 

 

 

 

터널 옆을 보니 안내판이 붙어있었다.

 

 

 

 

 

 

 

 

위험으로 라임을 맞추다니. 아니 그것보다 자전거길의 일부에 왜 이런 경고문이 있나. 경고문이 있다고 안 들어

 

갈 것은 아니지만, 터널 안으로 들어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평생 처음 와 본 문경의 외곽에서, 하루에 펑크가

 

두 번 난 자전거를 끌고 20km를 걷던 중, 점촌4동장 님이 충고를 해 주었음에도 무시하고 가다가 터널의 낙석에

 

맞아, 마침내 생명이 위험해지면, 참, 그것도 드센 팔자구나.

 

 

 

 

 

 

 

 

15km쯤 걸었을 때에 마침내 저 멀리로 문경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밤길을 달려본 라이더들은 아시겠지만

 

불빛이 보이고서부터의 5km는 이전의 5km와 다르다.

 

 

 

 

 

 

 

드디어 만난 문명의 출발점. 여기에서 왼쪽은 상주로 가는 길, 오른쪽은 문경시내로 들어가는 길이다. 건물을 끌

 

어안고 입이라도 맞추고 싶지만 멈추면 다시 걷지 못할 것 같아 꾸역꾸역 걷는다.

 

 

 

 

 

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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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구간으로 말하면 이제 겨우 두번째 구간. 이화령에서 출발해 문경읍까지 간 것도 이 구간

 

내에선 반도 안 된다. 다행히 각도가 세거나 커브가 심한 길은 끝나고 지금까지 흔히 보아오던 평온한 길이 이어

 

진다.

 

 

 

 

 

 

 

 

'고모산성' 등의 이름이 보이고 직선 길이 아니라 뺑 둘러가는 길이 나왔다 싶으면 이번 거점인 '문경 불정역'에

 

다 온 것이다.

 

 

 

 

 

 

 

 

불정역은 폐역이지만 관광 상품화를 잘 해 놓아서, 내가 도착했을 때엔 해가 질 무렵이었는데도 여전히 사람들

 

로 붐비고 있었다. 위의 지도에서 보듯 인근엔 도시 하나 없는 곳이라 모두들 자기 차로 놀러와야 하는 곳인데

 

도 그랬다. 불정역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왼편으로는 레일 바이크가.

 

 

 

 

 

 

 

 

오른편으로는 특히 불정역만의 명소인 레일 펜션이 있다. 이 레일 펜션은 자전거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매

 

우 유명한 곳이다. 관리하는 분께 여쭤 보니 2인실 1박에 12만원이라 하는데, 인적이 드문 산중이라 호젓한 분

 

위기가 있고 거기에 기차형 펜션이라는 신기한 모양까지 감안해 보면 크게 비싸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일정상

 

더 달려야하고 2-3만원의 지방 모텔에서 잘 예정이었기 때문에 구경만 했다.

 

 

 

 

 

 

 

인증 도장을 찍는데 다른 무인 인증센터에서는 보지 못하던 재미있는 것이 있어 사진을 찍어봤다.

 

 

 

 

 

 

 

 

다음 거점인 상주의 한 민박집에서 홍보용으로 명함을 꽂아두었다. 자전거도 실어다 주고 아침 저녁으로 제육

 

반찬을 주는 데 1박 3만원이라면 굉장히 싼 가격이다. 나는 내 발로 달려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웃고 말았지만,

 

예를 들어 함께 온 이가 슬슬 피곤해 한다든지 아니면 해가 져가는데 눈앞의 레일펜션은 너무 비싸 못 머물겠다

 

든지 하는 상황이 오면 아주 달콤한 유혹이 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리고 특히 좋았던 것은 이 홍보물이었다. 인증센터의 도장은 하도 많은 사람들이 찍어대어서 뭉그러져 있는

 

경우가 많다. 스탬프도 항상 열려있어서 꾹꾹 눌러도 도장에 잘 묻었는지 아닌지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주변에 굴러다니는 종이나 아니면 주머니 속의 영수증 따위를 꺼내어 한차례 시험삼아 찍어본 것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불정역에는 예의 업체가 아예 메모장을 준비해 둔 것이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이 부스 안에 들어와 있는 소비자의 가장 강한 필요를 잘 파악한 홍보라고 생각한다.

 

 

 

 

 

 

 

 

 

쿠당쿠당 달려온 회음부가 안쓰럽기도 하고 해서 잠시 쉬었다.

 

 

 

 

 

 

 

 

가까이서 보니 레일 펜션은 개조가 아주 잘 되어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한 차례 묵으러 오고 싶긴 한데,

 

인근에 강이 없는 것이 조금 아쉽다.

 

 

 

 

 

 

 

 

마지막 스퍼트를 내기 전에 관리실을 찾아 염치불구하고 자전거 배터리를 충전했다.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해,

 

싸온 초코바와 견과류를 먹으며 있었던 일을 메모하고 책을 읽었다.

 

 

 

 

 

 

 

 

관리실 구석에서 전기 쭉쭉 먹고있는 우량아 배터리. 아무데서나 잘 먹어주어 고맙다.

 

 

 

 

 

 

 

 

딱 한 시간을 채우고 일어났다. 만땅으로 충전시킨 전등이 있어 밤길도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새재자전거길의 마지막 거점, '상주 상풍보'로, 출발.

 

 

 

 

 

 

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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