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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1

심야의 탐험





이것의 정체는 마지막에. 색감이 좋아서 순서를 거슬러 일단 올린다.








오랜만에 가회 갤러리에 갔다. 가는 길인 북촌에 차 한 대 안 다니길래 대충 예상은 했지만 아예 텅텅 비어있을 줄은

몰랐다. 점원 분들도 내 음료를 서빙해 준 뒤로는 야외석에 나가 자기들끼리 한가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어 결국 내가

가게를 본 꼴이 됐다.








오늘 가회 갤러리의 전시물은 모형 기차와 돌 하우스(Doll House).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가회 갤러리는 사장님과

점원들이 엄청나게 친절해서 딱히 그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 명이 가서 고작 차

한 잔씩 시켰을 뿐인데 구경하는 우리를 따라 다니며 설명해 주랴, 돋보기 가져다 주랴, 가격 알려주랴 바쁘면서도 우

리보다 훨씬 즐거워 보였다. 아무튼, 건네받은 돋보기로 위 사진의 돌 하우스를 들여다 보면 아래와 같은 모양을 볼 수
 
있다.

 






윗 사진의 왼쪽 방. 확대한 이 사진에서도 잘 안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와인 라벨에 쓰여져 있는 문장까지 읽을
 
수 있다. 와인 한 병은 약지의 반 마디쯤 된다.








오른쪽 방. 벽에 걸려 있는 액자에는 한글로 된 '제과기능사 자격증'이 끼워져 있는데, 집에 돌아와 큰 화면으로 보고

서야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흥미가 갔던 모형기차. 한 량이 새끼손가락 길이 정도 된다. 기차역까지 함께 표현된 이 디오라

마의 실제 크기는 손바닥 정도이다. 이삼만 원쯤 하면 하나 사 달라고 떼써볼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가격표를 집어

든 동행자의 표정이 야차의 그것과 같길래 속으로 삼켰다. 얼마냐고 물어보거나 가격표 좀 건네달라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








기차계의 아이유라고 할 수 있는 증기 기관차. 판매자들도 여기가 바로 남심을 흔들어 놓을 셀링 포인트라는 것을 알

고 있던 모양인지 두세 량 정도만을 붙여두던 다른 기차들에 비해 증기 기관차에는 여남은 량을 연결해 두었다. 사람

키만큼 이어진 그 길이에 우선 놀라야 할텐데도 그럴 겨를조차 주지 않고 자신에게로만 눈길을 거칠게 잡아끄는 저 자

태. 아름답다.


 






이 사진은 기차와 돌 하우스가 전시된 쪽의 반대쪽 벽면. 레고로 만든 피규어와 포스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아랫줄 왼

쪽 끝의 압구정 날라리 듀오와 그 위에 있는 네모바지 스펀지 밥이 특히 눈에 띈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얼마 전에 들

었던 유머가 생각난다. 세상에서 제일 퍽퍽한 밥은? 정답은 스펀지 밥. 걸어다니며 인터넷을 할 수 있는 21세기가 되

어도 10대의 감성이란 대체로 유치한 쪽에 끌리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나는 딱히 잭슨 키드는 아니다. 내 성장기에는 이미 서태지가 등장하여 가요만으로도 충분히 감성을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음악을 전문적으로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전 시대에 비해 팝송을 들어야 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

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무서운 영화>를 필두로 한 일련의 패러디 영화들에 영혼을 바쳤던 나로서는
 
애들 고추 사냥에 나서거나 가짜 코를 붙이고 있는 등의 희화된 모습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는데, 이 포스터를 보고 있

자니 어쩐지 찡한 데가 있었다.

  
 






'이것'은 마이클의 몸 부분을 확대해서 찍은 것. 언젠가 응용해서 레고로 그림을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같이 있던 사람을 지하철 태워 보내고 나니 내가 타야 할 버스는 끊어져 있었다. 서울 시내라고 방심하고 있었던 것일

까. 그러나 밤바람이 시원하고 새로 받은 노래들이 mp3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 없이 걷기 시작했다. 가회동에

서 신촌이면 길을 잃어봐야 얼마나 잃겠나, 하고.








걷다가 만난 인사동의 거리악사. 사진에는 그만 찍혔지만, 실제로는 나를 포함한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느슨한 타원형

으로 둘러 앉아 노래를 들었다. 잠깐 서서 사진 정도만 찍고 걸어가려 했는데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를 부르는 바

람에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사진으로는 남기지 못했으나 항상 버스를 타고 무심히 지나가던 서울의 밤에서 나는 몇 개의 광경을 보았다.
자기 주

먹만한 시베리안 허스키를 산책시키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팔 가득 문신을 하고 큼직한 힙합 옷을 차려 입은 거구의
 
형님이라 평소같으면 상호 존중을 위해 눈도 안 마주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강아지가 내 쪽으로 아장아장 와서
 
킁킁 냄새를 맡길래 용기를 내어 참 예쁘네요, 하고 말을 걸자 그는 기쁜 얼굴로 그 개의 훌륭한 혈통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인사동 어귀에 있는 작은 광장에 잠시 앉기 위해 들어갔는데, 광장 바깥의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구석에
 
젊은 남녀가 있었다. 남자는 내 쪽으로 등을 보이며 서 있었고 여자는 그 앞의 벤치에 앉아 남자의 배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남자의 몸과 여자의 상반신이 간헐적으로 흔들리길래 둘 중의 하나가 우는 모양이구나, 생각을 했는데 멍하니
 
쳐다 보다가 오럴 섹스를 하는 중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관음증에서가 아니라, 나와 눈을 마주치면 어떤 반응을 보일

까가 궁금한 호기심에서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도 두 사람은 내내 오로지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있어 도리어 내가 변태

가 된 기분을 느끼며 머쓱하게 일어났다. 신촌역 앞 놀이터에서도 더 이상 볼 수 없어 멸종된 줄로만 알았던 (HOT 시

절) 문희준 형 머리 스타일의 여중생들은 독립문 앞에 생존해 있었다.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 손을 -보이지 않게-

흔들어 주었다. 이대 후문에서는 연극 연습을 마치고 나온 것인지 소복을 곱게 차려 입은 두 여자와 스쳐 지나갔다. 심

야의 탐험을 마치고 귀가한 시간은 새벽 두시 반. 고작 세 시간 산책에 마음 속의 자신은 어느덧 인디아나 존스 다 됐

다. 다음 번엔 강남역부터 신촌까지 정도라도 한 번 도전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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