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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1

몰랐던 마실




기다리던 저녁 약속이 몇 시간을 앞두고 무산되어, 홧김에 마트로 장 보러 가는 길에 버스를 잘못 타고 말았다. 타고

있던 버스의 차고지 한 정거장 앞에서 내린 것이라 다른 버스도 딱히 빨리 올 것 같지 않았고, 도로 위 표지판의 이름

들도 수색교니 DMC니 하는 낯익은 것들이어서 목적지까지 걸어 보기로 했다. 가다 보니 강북 살면서도 딱히 들어가
 
볼 일 없었던 난지 공원과 월드컵 공원이 눈에 띄어, 이곳을 통해서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의 내비게이션 기능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나이니, 이미 그쯤엔 목적지에 가거나 말거나 별 상관없는 심정이 되었던
 
것도 같다. 평일이라지만 얼추 퇴근 시간 근처였는데도 그 넓은 공원에서 마주친 사람이라곤 손 꼽을 정도였다. 일부

러 시계를 봐야 지는 해인 줄 아는 것이지 마음만 먹고 보자면 아침같은 햇빛이라, 목도 쭉쭉 펴고 손도 휘적휘적거리

며 여기저기 걸어다녔다. 빼기 귀찮아 놓아 두었던 mp3의 조원선 1집이 아주 대활약해줬다. 시야가 넓어지고 인적이

드물어질수록 나는 점점 대담해져, 마침내 노래를 큰 소리로 따라부르거나 팬티가 보이도록 만세만세를 부르며 뛰어

다니기도 했다. 발목이 시큰거리도록 걷고 나니 마침내 출구가 보였다. 으쓱해져서는 얼마나 휘젓고 다녔나 지도를 통

해 살펴 보니 최단 거리를 주파한 것이었다. 머쓱한 마음 반, 닭고기를 반쯤 먹고 밤에 오븐에 데워먹으려고 냉장실에

넣을 때 드는 만족감 반. 아무튼 대체로 좋은 기분이라 이름 모를 수입맥주 댓 병과 대하 튀김을 사들고 왔다. 보던 책

마저 보다가, 열두 시 종이 치면 삼십대 독신귀족으로 변신해 영화와 함께 즐기다 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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