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 썸네일형 리스트형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패딩 잠바를 입고 나가도 오르막이 아니면 땀이 나지 않고 몇 달째 전기장판에 불 넣고 잠자리에 드는 사월 말. 첫 모기가 나다닐거면 춥지나 말든지. 잠귀가 몹시 밝은 터라 피곤한데도 깨어 버린 분함에 형광등을 다시 켜고 침대가에 걸터 앉았는데, 정신 차리고 둘러보니 범인은 손 뻗으면 닿는 벽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 앉은 자리에서 십여 마리는 거뜬히 잡아대던 지난 여름의 모기 사냥 기술은 간데 없고, 사장님 훈화 말씀에 치는 박수처럼 열없 게 느릿느릿 양 손을 척 맞붙였는데 거기에 덜컥 걸려들었다. 손바닥을 펴서 다잉메시지를 바라보며, 봐라, 남들 나올 때 나오지 그랬니, 모난 돌이 정 맞는단다, 하고 복수의 완성을 즐기다가, 맨 처음 나온 놈이 무슨 백이 있 고 선배가 있어서 그걸 배웠겠나, 하고 갑작스.. 더보기 재회 작년 대선의 다음 날부터 전국의 이곳저곳에 출몰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는데, 거주 중인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도 드디어 등장하였다. 군대 선임들을 제하면, 아마도 가장 반갑지 않을 재회. 더보기 4.19와 광장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13만 5천명의 지상군을 이끌고 쳐들어오며 시작된 한국전쟁은 만 3년이 지난 53년 7 월에야 휴전 상태로 들어갔다. 전쟁 중 최초로 정전회담이 제의된 시기로부터도 25개월 뒤였고, 그간 이루어진 회담만도 총 765회였다. 내전으로 시작했으나 종국에는 냉전의 주요 축들이 모두 참가하게 된 이 전쟁이 한국인에게 남긴 상흔은 깊었 다. 전쟁 중의 사망자는 가장 보수적인 수치로도 300만 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한반도 인구의 1/10에 달하는 수치였다.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으며 5백만 명이 난민 신세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전쟁사에 여러가지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한 예로, 휴전 1분 전까지 원산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은 총 861 일간으로 이는 아직까지도 현대 미 해군 .. 더보기 또 명예훼손 신고 메일함의 새 편지에서 'Clean Daum에서 알려 드립니다'라는 제목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명예훼손 신고. 신고인은 작년 이맘때쯤 '독서일지' 카테고리 내의 의 독후감을 신고했던 '한국인터넷 선교네트워크'이다. 나는 두 편의 일기를 통해 이 때의 경험을 적어둔 바 있다. http://chleogh.tistory.com/entry/명예훼손-신고를-당했다 http://chleogh.tistory.com/entry/명예훼손-신고의-결말 두 번째 기사에서 정리해 두었던 이 과정을 다시 한 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인터넷선교네트워크'(이하 선교)에서는 내 기사가 자신들, 혹은 자신들이 대리하고 있는 집단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여겨 다음클린센터에 명예훼손 신고를 하였다. 2. 해당 게시물은 즉.. 더보기 벚꽃 단상 등교길,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고개를 푹 숙이고는 익숙한 골목의 초입에 들어서는데 코가 따가울 정도의 벚꽃 향이 찌르고 들어왔다. 꽃나무 옆을 지나는 중인가 하고 고개를 들어 옆을 쳐다보니 담벼락 뿐이었다. 주위를 휘 휘 둘러보자 저만치 꽃나무가 보였다. 설마, 이 거리에서 싶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향은 아주 진해졌다. 나는 항상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돈부리 집 앞을 지나면서 끼니마다 마음 놓고 고기덮밥 먹는 이들을 부러워 했 는데, 가게 바로 앞에서 오늘처럼 강한 꽃향이 난다면 토핑을 배로 얹어준대도 사절하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참치 큰 캔 하나를 통째로 넣고 김치찌개를 흡족하게 끓여먹은 직후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그 향은 몇 년동안 기억될만한 것이었다. 앞으로 한동안 꽃 향기를 맡으면 이.. 더보기 뽑기 강의를 나가는 고등학교는 교문부터 건물까지 꽤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한다. 갑자기 볕이 좋았던 어느 날, 겹겹이 껴입고 나간 옷 탓에 난 땀을 한차례 식히려고 교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가 그간 백 번도 넘게 지 나다녔을 교문 앞 문구점의 뽑기룰 보았다. 뽑기라고 하면 쇠국자에 설탕과 소다를 섞어 구운 간식거리를 가리 키기도 하고, 큰 도화지에 엄지손 정도의 접힌 종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하나씩 떼어내 그 안에 적힌 상품을 수령하는 사행성 상품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나는 뽑기라면 역시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리면 장난감 따위의 제 품이 담긴 캡슐이 나오는 이 기계가 떠오른다. 기본이 200원. 내가 어릴 때에도 보통 100원이었었는데, 액수로 쳐도 얼마 안 오른 것이고 배율로 쳐도 고작 두 배 정.. 더보기 <설국열차> 탑승권 2013년에 개봉하는 한국 영화 가운데 가장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이자 제작비만 450억이 소요되었다는 소식 등이 이미 제작 단계부터 무성 한 화제에 오른 바 있었다. 영화는 동명의 그래픽 노벨을 극화한 것이다. 가까운 미래, 동서 양 진영의 '기후 무기'를 이용한 분쟁 끝에 전 지구는 눈에 뒤덮인 '설국'이 되고 만다. 생존자들은 전세계로 이어져 있는 철도 위를 영원히 횡단하는 '설국 열 차'에 몸을 싣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하나의 열차는 하나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 안은 식량칸, 조리칸, 거주칸 등 기능적으로 분리되기도 하고, 가난 한 이들이 득시글거리는 칸과 부유한 이들이 넉넉하게 사용하는 칸 등 계급적으로 분리되기도 한다. 만.. 더보기 중의법重義法? 강의를 나가는 고등학교의 남자 화장실 소변기에 붙어 있는 안내 문구. 1번과 2번도 그렇지만 3번은 정말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더보기 노변정담路邊情談 비오는 건널목에서, 덜덜 떨며 안내봉을 들고 있는 아주머니를 보고는 얼마 전 읽었던 기사 중 일부가 떠올랐다. 학교 중에는 학부모들에게 급식과 교통정리를 의무로 시키는 곳이 있는데, 이것이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거니 와, 심지어 학교에 부과되어 있는 의무사항인데도 학부모들을 무급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맞벌이인 어머니의 경우엔 눈치를 봐가며 휴가를 내서 참가하는데, 평소에 자주 참가하지 못하는 미안함에 일정 금액을 내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진 곳도 있다고 했다. 사진으로는 잘 나오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아주 긴 건널목이라, 신호등의 주기 차가 길었다. 빨간 불이 들어오길 기다려 어머니회세요, 하고 말을 붙여 보았다. 아주머니는 움찔하면서 쳐다 보더니 왜요, 라고 답했다. 아니, 학 교에서 이런 걸 .. 더보기 오마쥬? 어딘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지는 알 수가 없어서, 길가에 멈춰 서서는 팔짱을 끼고 한참이나 관찰하고 나서야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대담하고 헌걸찰 수가 있나. 그 기세에 눌려 한눈에 깨닫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엘큘 포와로와 헤이스팅스 대위였는지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탐정과 탐정의 친구가 큰 지도를 펼쳐 놓고 상대방이 언급한 지명을 찾는 게임을 하는 장면을 읽은 적이 있다. 탐정의 친구가 자기라면 깨알같이 작은 지명을 고르겠다고 하자, 탐정은 혀를 쯧쯧쯧 차며 (홈즈라면 아마도 '왓슨, 오 나의 왓슨'이라는 말을 했을 것인데) 지도의 한 쪽 끝에서 대각선의 반대쪽 끝까지 크게 걸쳐져 있는 이름을 골라야 한다고 말했 다. 사람들은 엄청나게 노골적으로 드러나.. 더보기 만보기 새로운 버스 루트를 찾는 낯선 퇴근길. 익숙한 것 같지만 생각해 보니 막상 직접 마주친 것은 꽤 오래된 것 같은 거리의 행상. 슥 봐도 온통 중국제. 어플로 버스 도착 시간을 보니 십여 분이 넘게 남았다. 뭐 재미있는 거라도 있을까 싶어 기웃기웃거리고 있자니 옆 건물의 처마 밑에서 아직 찬 봄바람을 피하고 있던 주인 아저씨가 잠바 의 주머니에 팔을 끼워넣고는 종종 걸음으로 다가온다. 다이소 앞에 좌판을 벌린 것이 꼭 맥도날드 앞에서 핫도그를 파는 모양새 같아 왜 그리 했는지 물어보니, 그저 목이 좋아서 그랬다 한다. 호쾌한 것 같기도 하고 게으른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오랜만에 그 모습을 보고 그리움이 살아났던 만보기. 얼마인지를 묻지도 않았는데 아저씨는 옆에서 흘끔흘끔 눈치를 보.. 더보기 전기 자전거 2 전기 자전거에 대해 이런저런 정보들을 알아가다 보니 직접 한 번 타보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다행히도, 여러 전기 자전거들 중 특히 관심이 있었던 이스타 26을 만든 회사인 알톤은 애당초 자전거 전문 기업이었기 때문에 서울 각지에 지점이 있었다. 그 중 운동 삼아서 걸어 다녀올 수 있는 지점을 골라 전화를 해 보니 재고가 동이 나 서 팔 수 있는 물량은 없지만 시승용은 한 대 있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어차피 당장은 춥기도 하고 살 돈이 없기 도 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별로 토를 달 이유가 없었다. 시승해본다고 하고 그대로 내빼는 놈들이 많았던 듯, 자전거 한 대 잠시 타 보는 데에도 회원카드를 만들고 신분 증을 맡긴 뒤에야 탑승할 수 있었다. 복장에서도 알 수 있듯 자전거의 요모조모를 따지며 시승해보겠다.. 더보기 전기 자전거 책과 레고, 그리고 자가 부동산을 제하고는 큰 돈이 생긴다 하더라도 딱히 사고싶은 것이 없는 무소유 삶에, 지 난 반 년 간 그나마 눈독을 들인 물건이 있다면 전기자전거를 꼽을 수 있겠다. 에코 어스를 위한 마음이라기보다 는, 숨어서라도 오토바이를 탔다간 경을 칠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대체용 탈것을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눈이 미 친 것이다. 첫번째 위시리스트는, 한 차례라도 전기 자전거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라면 단박에 첫사랑에 빠져버렸을 만도의 '풋루스'. 영국의 유명 디자이너에게 큰 돈을 주었다는 차체 디자인은 위의 사진에서 보이듯 단순하고 세련되어 눈길을 잡아끈다. 체인이 없는 것도 깔끔한 인상에 한 몫 하는 요소이다. 이 디자인은 출시 이후 지금까지 세계 적 디자인 대회에서 몇 차례나 우승한 이력이 .. 더보기 확실히 나가서 걷기라도 해야 쓸 것이 생긴다. 예전 같으면 사람은 왜 저런 걸 믿을까 생각해 보면서 가던 길 갔겠지만 마음이 지친 어느 날에 보게 되니 멈춰 서서 사진도 찍고 쓰다듬어 보게도 된다. 이런 때엔 세상 만물과 만사가 결국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선승의 법어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중곡동 의 쌀집 앞에서. 더보기 국립국어원 선정 2012 신조어 재미있는 자료를 발견하여 참고 삼아 올려 둔다. 국립국어원(www.korean.go.kr)에서 2011년 7월부터 2012년 6 월까지 조사하여 작년 12월에 보고서로 작성하였다는 '2012 신조어' 목록이다. 그림화일로 정리된 위의 목록에 는 7가지만이 소개되어 있지만, 관련 기사를 뒤져보니 적어도 20여개 이상의 단어들이 '신조어'로 인정받고 있 었다. 보고서에는 더 많이 소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신조어(新造語)란 새로 만든 말이다. 기존의 단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것이니 구성의 원리 에 있어서는 다소 조악한 면이 없지 않겠지만 시대의 주요한 조류들을 반영한다는 면에서는 나름의 연구 가치가 높지 않을까 싶다. 목록들 중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역시 장기화된 경제 위기와 그에 따.. 더보기 공상 지금 당장, 딱 한 차례만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몇 년 쯤의 시간을 멈출까. 멈춘 시간 동안은 무엇을 할까. 그 답으로 그 사람을 알 수 있을까. 더보기 LEGO 21003 Seattle Space Needle 반 년 전쯤 소개했던 '숭례문'에 이어 또 한 번 선물받은 레고 아키텍쳐 시리즈. 제품번호 21003번인 시애틀의 스페이스 니들이다. 아키텍쳐 시리즈 중에서는 소형으로 초기 제품군 중 하나인데,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 제품 때문에 이 시리즈에 흥미를 갖게 됐다. 죽기 전에 미국에 가는 일이 없더라도 나는 딱히 유감이 없지만, 만약 가 게 된다면 아마도 록키 산맥과 이 스페이스 니들 때문일 것이다. 왼쪽은 박스, 오른쪽은 설명서. 레고의 가장 기본적인 부품들로 간략하게 표현해 냈으면서 가격은 낮지 않아 일명 가성비, 즉 가격대 성능비가 좋지 않기로 이름난 아키텍쳐 시리즈이지만, 박스와 설명서 만큼은 불만을 토하기가 어렵다. 적당한 크기와 빠닥빠닥한 재질. 구도를 달리 하여 몇 장 찍어 봤는데, 구도를 다르게.. 더보기 동갑내기 '탈옥'이라고 불리우는 개조를 하지 않고도 아이폰에서 옛적의 도스 게임을 구동할 수 있는 정식 어플이 있는데, 한동안 금지되어 있다가 근래에 다시 풀렸다는 뉴스를 읽었다. 대체로 뚜렷한 목적이나 엔딩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요새의 온라인 게임과 달리, 도스 시절의 '오프라인' 게임 은 정해진 스토리가 있어 마치 한 권의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을 주곤 했다. 투박한 그래픽은 오히려 상상력을 자 극해서, 게임에는 사실 있지도 않았던 총천연색의 장면이 십수 년이 지나도록 잔상처럼 남아있는 것도 많다. 휴대폰으로 그 게임들을 다시 해 볼 수 있게 된 세상이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다가, 가장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 는 한 작품이 문득 떠올라 이미지를 몇 장 검색해 보니, 주인공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치와 어느새 .. 더보기 도서관에서 재학 중인 연세대학교의 중앙 도서관은 구 도서관과 신 도서관의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내가 주로 찾는 곳은 인문 도서가 있는 구 도서관 2층과 사회-예술 도서가 있는 구 도서관 3층이다. 2층과 3층은 내부의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때문에 2층에 있다가 3층의 도서를 찾고 싶을 때, 굳이 2층의 출입 구로 다시 나가 3층의 출입구로 들어가야 할 필요가 없다. 내부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된다. 나는 대체로 대출할 도서의 위치를 미리 검색해둔 뒤, 2층의 출입구로 들어가 내부의 계단으로 올라갔다가 3층의 출입구로 빠져나오 는 동선을 짠다. 그런데 계절에 따라 여덟 시에서 열 시 정도까지 개방하는 2층 출입구와 달리, 3층 출입구는 언제나 저녁 나절이 면 봉쇄가 된다. 봉쇄가 되고 나면 3층.. 더보기 펜을 버릴 때 다 쓴 펜을 버릴 때에는 묘한 느낌이 든다. 특히 이 펜처럼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면 더욱 그렇다. 이만큼 이나 어딘가에 줄을 치고 뭔가를 썼구나, 하고 조금 뿌듯하다가, 이만큼이나 잉크를 써 제낄만한 공부를 하였나 생각해 보면 부끄럽지 않기가 어렵다. 학내 문구점에서 학생 할인을 받으면 천 원이 안 되는 값에 사는 펜 하나 를 버리면서도 이런저런 심상이 드는데, 어렵게 구하고 귀하게 썼던 붓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됐을 때 옛 문인 들이 마치 친구가 죽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새 펜을 사야 했는데 설 연휴 중이라 문구점은 이곳이고 저곳이고 열지를 않아, 편의점에 들러 써 본 적이 없는 펜을 샀다. 집에 돌아 와 종이 위에 그어 보니, 굵은 선이 끊이.. 더보기 얼굴 나는 오래된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주변은 비가 많이 온 날의 늦은 오후처럼 어슴프레하고 안개가 많았다. 계단은 세 사람 정도가 겨우 지날 만한 넓이에 경사가 매우 가팔랐다. 발디딜 곳이 좁아 다음 발 놓을 곳을 보며 걸어야 했다. 시야의 위로는 온통 계단 이었고 뒤는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밑만 보는 눈길 옆으로 얼핏얼핏 숲이 비쳤다. 똑바로 쳐다보지 않아도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은 분명했다. 똑같은 발걸음을 계속해서 옮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부터 척척 따라오더니 이내 나와 걸음을 맞추었다. 그 인지 그녀인지가 내 어깨를 툭툭 쳐 고개를 돌려 보니,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한 손으로는 내 얼굴을 떼어 자신의 얼굴에 붙이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얼굴을 떼어 내.. 더보기 숙원 나는 육 년 간의 유배에서 풀려나 마침내 두발의 자유가 다시 주어졌던 이십 대의 초반에, 여러가지 전위적인 시 도들을 한 바 있었다. 이것이 스물한 살인 2001년. 이것이 스물두 살인 2002년. 그리고 이것이 스물세 살인 2003년의 모습이다. 머리의 모양을 바꾸며 즐거워 하는 것은 끝이 없을 줄 알았는데, 3년 정도면 충분했던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중 고교 시절 머리를 기르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한 반항심에 불과했던 것인지, 이후로는 머리를 어떻게 해 보고 싶다 는 생각이 딱히 들지 않았다. 이 다음 해인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군대에 다녀온 뒤로는 더 그렇게 됐다. 그 뒤로는 기껏해야 귀찮아서 안 자른 탓에 길이가 조금 길어지거나, 아니면 스스로 자른 탓에 모양이 조금 우습거 나 하는 정도에.. 더보기 득템 퇴임을 앞두신 이명박 대통령 각하의 말씀대로, 일찍 일어나는 사람에게 사랑과 은총이 있었다. 실은 밤을 새고 자기 전에 간 학교 도서관이지만 아무튼 아침은 아침. 생각해 보니 일반 도서도 신간이 계속해서 들어오는데 한 주마다 쌓여 대는 수십 종의 주간 잡지는 어떻게 다 보관을 하는지, 의심 한 번 안 해 본 것이 더 이상하다. 과 도 어느정도 섞여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보수신문의 주간지와 경제 주간지. 멀리서 발견 했을 때의 생각처럼 물 반 고기 반은 아니었다. 와중에 발견한 오늘의 득템. 돈 주고라면 사서 절대로 사서 읽지 않았을 책이지만 공짜로 얻게 되고 보니 나름으 로 기뻤다. '나꼼수 시대'를 유쾌하게 기억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기록물이 다시 있을까. 작년 연말인 대선 전 날 나꼼수의 마지막 에피.. 더보기 휘핑 듬뿍이요 몇 년 동안 기억될 올 겨울의 한파, 겨우 버텨낸 줄 알고 방심하고 있다가 감기 걸릴 뻔 했다. 입춘에 이런 폭설 이 웬 말이람. 더보기 무지기(無支祁) 무지기(無支祁)는 전설 속의 수신(水神)의 이름이다. 무지기가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상고 시대인 우임금 때이다. 평화로운 때를 가리키는 '요순시대'라는 말 은 요임금과 순임금이 통치했던 시대를 말한다. 우임금은 범람하기 일쑤였던 황하의 치수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 끈 공적을 인정받아, 바로 그 순임금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다. 기록에 의하면 우임금이 치수 작업을 한 기간 은 9년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옛 기록에서 9년은 단지 십 년에서 한 해 모자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 척 긴 시간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긴 시간이 소요되다 보니, 그 간에 여러가지 괴상하고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무지기는 회수(淮水)와 와수(渦水)의 수신(水神)이다. 회수(淮水)와 와수(渦水)는 중.. 더보기 헤이, 놀러갈래? 나도 그러고 싶다. 더보기 그림자 없는 아이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늙은 사람의 아이, 귀신이 낳은 아이, 꿈 속에서 잉태하여 낳은 아이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라고 하나, 이는 시골 사람들의 어리석은 말로 믿을만한 것은 못된다. 하지만 옛 책에 증거가 있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응소(應劭)의《풍속통(風俗通)》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진류(陳留) 땅의 아흔 살 먹은 부유한 노인이, 소작인의 딸을 첩(妾)으로 삼아 한 번 관계를 갖고 나서 죽었다. 후에 그 첩이 아들을 낳자, 본처의 아들이 첩에게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연세가 많아서 성교를 할 수 없었을 것인데, 한 번 동침을 하였다고 어찌 아들이 생기겠소. 당신 이 밖에서 음란한 짓을 해 놓고 우리 집안을 더럽히려는 것이 아니오." 그리고는 서로 재산을 놓고 다툰 .. 더보기 정월 일기 하루가 이틀인지 아침이 새벽인지도 알지 못하고, 배고프면 부를 때까지 먹고 졸리면 깰 때까지 잔다. 배가 차면 두어 숟갈 들었더라도 곧 그만두고 차지 않으면 두 그릇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신이 깨면 두 시간을 잤어도 일어나 앉지만 혼미하면 시계도 보지 않고 다시 돌아눕는다. 오롯이 남는 시간은 자고 일어난 자리에서 한 발짝 떨어진 앉은뱅이 책상에서 옛 글을 번역하는 데 쏟아붓는데, 덕분에 못해도 하루에 한 권은 읽던 다른 책들은 사 흘이 지나도록 반 권도 못 읽는 일이 허다하다. 진즉에 이렇게 했으면 박사과정의 학기도 이미 끝나 있을 것을, 때늦은 석사를 따겠다고 짧게는 백 년 길게는 삼천 년 전의 글을 붙잡고 기진맥진 애를 쓰는 모습이 반은 기특하 고 반은 허망하다. 계사년 정월에 연희동에서 쓴다. 더보기 김수항이 죽기 전날 밤 귀신 꿈을 꾸다 문충공 김수항은 용모가 매우 수려하였다. 일찍이 한 마리 나귀를 타고서는 한 동네를 지나가는데, 역관 집안의 딸이 창문 틈으로 그를 보고서는 마음으로 흠모하게 되었다. 그를 지아비로 삼고자 생각하였지만 입 밖으로 내 기가 어려워, 마침내 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 아비가 캐묻자 딸은 비로소 이유를 말하였다. 아비는 이야기를 다 듣고 김공을 찾아가 인사한 뒤 딸을 거두어 처로 삼아주기를 청하였다. 김공은 성격이 본래 강직하여, 그 딸의 행실이 바르지 못한 것을 크게 질책하였다. 아비는 두려워 벌벌 떨면서 집으로 돌아와 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딸은 그 말을 듣고는 눈물을 삼키며 죽고 말았다. 후에 김공은 대신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탄핵을 받아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유배 몇 년 후에.. 더보기 지퍼를 내리는 손 한참 책을 읽다가 요의를 느끼고 화장실에 가보면 바지의 지퍼가 이미 열려 있다. 전에 열고 안 닫았을 수도 있 고 공부를 하다가 막혔을 때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열었을 수도 있으니 별스럽게 여기지 않고 튼실히 끝까 지 올리는데, 몇 시간이 지나 다시 화장실에 가 보면 지퍼는 어느새 또 내려가 있다. 바지의 문제인가 싶어 다른 바지를 입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나는 사람이 공부에 열중하였을 때 그가 앉은 의자 밑에서 스윽하고 손을 올려 지퍼를 살살 내리는 귀신의 정체를 눈치채었다. 더보기 이전 1 ··· 3 4 5 6 7 8 9 ··· 5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