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쓴 펜을 버릴 때에는 묘한 느낌이 든다. 특히 이 펜처럼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면 더욱 그렇다. 이만큼
이나 어딘가에 줄을 치고 뭔가를 썼구나, 하고 조금 뿌듯하다가, 이만큼이나 잉크를 써 제낄만한 공부를 하였나
생각해 보면 부끄럽지 않기가 어렵다. 학내 문구점에서 학생 할인을 받으면 천 원이 안 되는 값에 사는 펜 하나
를 버리면서도 이런저런 심상이 드는데, 어렵게 구하고 귀하게 썼던 붓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됐을 때 옛 문인
들이 마치 친구가 죽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새 펜을 사야 했는데
설 연휴 중이라 문구점은 이곳이고 저곳이고 열지를 않아, 편의점에 들러 써 본 적이 없는 펜을 샀다. 집에 돌아
와 종이 위에 그어 보니, 굵은 선이 끊이지 않고 줄줄 이어졌던 버린 펜에 비해 얍실한 선이 쫄쫄 나온다. 공부
중에 느끼는 소소한 재미가 하나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