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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3

4.19와 광장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13만 5천명의 지상군을 이끌고 쳐들어오며 시작된 한국전쟁은 만 3년이 지난 53년 7

 

월에야 휴전 상태로 들어갔다. 전쟁 중 최초로 정전회담이 제의된 시기로부터도 25개월 뒤였고, 그간 이루어진

 

회담만도 총 765회였다.

 

 

 

내전으로 시작했으나 종국에는 냉전의 주요 축들이 모두 참가하게 된 이 전쟁이 한국인에게 남긴 상흔은 깊었

 

다. 전쟁 중의 사망자는 가장 보수적인 수치로도 300만 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한반도 인구의 1/10에 달하는

 

수치였다.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으며 5백만 명이 난민 신세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전쟁사에 여러가지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한 예로, 휴전 1분 전까지 원산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은

 

총 861 일간으로 이는 아직까지도 현대 미 해군 역사상 최장 기간의 공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끔찍한 기억은

 

엎드려 뻗쳐 자세에서 손을 뒷짐지고 머리만으로 체중을 감당하는 체벌의 이름인 '원산 폭격'에 그 흔적을 남겼

 

다.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한국전쟁의 참혹한 실상은 세계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몇몇 예술가들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아 인간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파블로 피카소의 1951년 작인 <한

 

국전의 대학살>, 혹은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피카소가 이 작품을 그리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정설이 확정되지

 

못한 채로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은 당시 공산주의자였던 피카소가 프랑스 공산

 

당의 의뢰로 한국전쟁 중의 한 사건인 신천 양민학살 사건을 소재로 하여 그렸다는 설이다.

 

 

 

신천 양민학살 사건은 미군이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50일 간에 걸쳐 황해도 신천군에 머물면서 군 인

 

구의 약 1/4인 3만5천 명을 학살했다고 하는 사건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남한 측에서는 미군과 상관없이 반공

 

성향의 북한 주민들이 북한 정부군에 맞서 싸운 반공투쟁이었다고 주장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당시의 생

 

존자가 남긴 인터뷰도 있고, 처음부터 북한군이 날조해낸 사건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 정부는 '공산주의자 피카소' 설을 신뢰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한국 정부에 의해

 

반미 작품으로 지정되어 1980년대까지 반입 금지 예술품 목록 상에 있었다.

 

 

 

 

 

 

 

 

중공군과 인민군 포로

 

 

 

전쟁의 가장 막바지에 이루어졌던 회담들은 주로 포로 교환에 관한 문제였다. 부상을 입은 포로가 우선적으로

 

송환되었으며 이후 일반 포로들도 차례차례 송환되었는데, 그 가운데 본국으로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이 있었다.

 

총 47,000명이었다.

 

 

 

이들은 몇 가지의 절차를 밟아야 했다. 중립위원국인 인도군의 감시 하에, 먼저 본국의 대표들이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4개월간 설득을 했다. 포로의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사로잡힌 나에 정

 

착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소수이지만 북도 남도 택하지 않고 제3국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 이들이 있었

 

다. 유엔 총회는 이들을 위해 인도와 브라질 등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1954년 2월, 망명을 요구한 88명의 포로가 인도행 배에 승선하였다. 이들 중 56명은 브라질에, 15명은 인도에,

 

그 외는 각국으로 흩어져 정착을 할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한국전쟁은 끝났다. 이 마지막 장

 

면은 당시 부산에 임시로 설치되어 있었던 서울대 법대의 한 재학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막 열아홉 살이 된

 

그의 이름은 최인훈(1936- )이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

 

 

 

그러나 50년대 한국 사회의 상황은 한 청년이 전쟁 중 받았던 심상을 차분히 가다듬고 있을 만큼 평화롭지 않

 

다. 전후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던 것은 대체로 해외로부터의 원조였는데, 57년을 기점으로 도움의 손길은 차

 

츰 감하게 되었다. 경제의 주요한 한 축으로 새로 등장한 재벌은 줄어가는 이 원조마저 독점하고 정경유착의

 

특혜를 바탕으로 성장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대통령 이승만과 여당인 자유당 정권이 장기집권을 누리고 있었다. 50년대 내내, 이들은 대통령직

 

과 여당의 위치를 사수하기 위해 사사오입과 정치깡패 고용, 부정선거 등의 각종 술수를 아끼지 않았다. 와중,

 

56년 대통령선거에서의 이승만에 대한 낮은 지지율과 58년 민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이 개헌선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이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신호였다. 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불리한 상황에서

 

의 수권을 위한 거대한 기획이 모의되기 시작했다. 온전히 깨끗한 선거가 단 한 번도 없었던 현대사에 있어 아직

 

지도 부정 선거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3.15 선거의 시작이다.

 

 

 

 

 

 

 

 

전임 김일환 내무부장관(좌측)과 신임 최인규 내무부장관(우측)

 

 

 

선거 한 해 전인 59년 11월,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전국 각 시, 도의 경찰국장, 사찰과장, 경찰서장, 군수, 시장,

 

구청장 등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필승을 위한 지침을 하달한다. 그 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이 '4할 사전투표'와 '공

 

개투표' 전략이다.

 

 

 

'4할 사전투표'는 자연 기권이나 무효, 전출자 등으로 인해 전체 유권자 중 투표를 할 수 없는 이가 총 40%에 달

 

할 것이라 예측하고, 선거가 끝나면 미리 만들어 둔 40%의 자유당 표를 섞어넣는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 최종

 

투표율이 60%쯤일 것이라 예상하고 나머지 40%를 이승만 지지표로 몽땅 채워넣는다는 것이었다.

 

 

 

'공개투표'는 유권자를 3인조나 9인조로 편성하여 공개적으로 투표하게 하되, 한 조의 조장은 반드시 자유당 당

 

원이나 경찰관, 공무원이 맡도록 하는 전략이었다. 이는 현대 선거의 4대 원칙 중 하나인 비밀 투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외로 야당의 후보 등록을 '서류 미비'로 끝까지 거부하거나 아니면 후보 등록을 하게 되어 있는 구청 앞에서

 

등록 서류 자체를 강탈하여 도망치는 치졸한 계획도 세워졌다. 이 전략들은 모두 다음 해의 3.15 선거에서 실제

 

로 시행되었다.

 

 

 

 

 

 

 

3.15 선거 당시 이승만 후보 포스터

 

 

 

 

선거 한 달 전, 민주당의 강력한 대권 후보로 이승만의 실질적 라이벌이었던 조병옥이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

 

으로 갔다가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이로써 이승만의 승리는 확실시되었지만, 3.15 프로젝트 자체는 취소되는

 

일 없이 꾸준히 진행된다.   

 

 

 

선거를 열흘 남짓 앞둔 60년 3월 3일, 야당인 민주당은 해당 서류를 고발한 양심경찰의 도움으로 '9할 5분 득표

 

를 위한 사전투표, 공개투표, 환표, 환함' 계획을 폭로한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전국에서는 부정선거 계획을 규

 

탄하는 시위가 잇달아 일어나게 된다.

 

 

 

3월 8일 대전과 부산. 3월 10일 대전, 수원, 충주. 3월 12일 부산, 청주. 선거 하루 전인 3월 14일에는 서울, 부

 

산, 포항, 인천, 원주, 문경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3월 15일이 밝았다.

 

 

 

 

 

 

 

민주당의 3.15 선거 부인공고

 

 

 

선거는 예정대로 시행되었다. 많은 투표소에서 야당 참관인들의 참관이 저지되었다. 마산의 경우에는 47개 투표

 

소 중 야당 참관인이 참관한 투표소가 3군데에 불과했다. 자유당의 참관인들만이 참여하는 개표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일 오전 열 시 삼십 분, 민주당은 3.15 선거를 무효로 규정하고 선거 포기 선언을 했다. 이날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이 발포하여 총 7명이 사망하고 870여 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마산에서의 시위 도중, 열여덟

 

의 마산상고 학생 하나가 실종됐다. 

 

 

 

선거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기붕을 찍은 표가 총 유권자 수를 초과

 

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군 부대가 밀집해 있는 지역에서는 투표율이 120%에 달하기도 했다. 이승만과 이기붕은

 

시위를 과잉 진압한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을 경질시킴으로써 민심을 달래고자 했다.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체

 

 

 

4월 11일, 마산 시위 도중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시체에는 눈에서 뒷머

 

리까지 최루탄이 박혀있었다. 경찰은 부검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사인을 확인했

 

다고 한다. 이 학생의 이름은 김주열이었다.

 

 

 

부산일보의 마산 주재 기자 허종이 그의 사진을 찍었고, 사장이었던 고 김지태는 1면에 이 사진을 싣기로 결정

 

한다. 이 충격적인 사진은 전국에 퍼짐과 동시에 AP통신을 통해 해외에까지 전파되었다. 이 날로부터 전국적 시

 

위가 시작되었다.

 

 

 

4월 19일, 13시 경 서울에는 이미 10만 명이 운집하였다. 13시 40분, 경무대 앞에 모인 2만 명의 군중들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하였다. 15시에는 서울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17시에는

 

부산, 대구, 광주, 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이날 하루, 전국에서 총 111명의 민간인과 4명의 경찰이 죽었다.

 

 

 

 

 

 

 

 

4.19 당시 자료사진

 

 

 

계엄령 선포와 과잉 진압은 시위에 불을 붙였다.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4월 25일에는 그간 학생들 위주로

 

이루어지던 시위에 대학 교수들이 집단적으로 동참했다.

 

 

 

4월 26일, 오전 10시경 서울에는 이미 10만 명의 시민이 시위를 진행하고 있었다. 전국적 시위 이후 7일간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승만을 움직인 것은 주한 미 대사였던 W. P. 매카나기였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하야를 권

 

유한 것이 매카나기 본인이 아니라 매카나기가 전화를 바꿔준 CIA 국장, 혹은 CIA 한국 담당자 피어 드실바로, '2

 

시간 안에 총사퇴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메세지를 받았다는 설도 있다. 어찌 됐든 이승만은 10시 30분

 

에 하야를 결정하고, 같은 날 오후 1시에 라디오를 통해 하야 선언을 한다.

 

 

 

 

 

 

 

 

이승만의 대통령 사임서 사본

 

 

 

4. 19는 성공으로 끝났다. 부통령 이기붕은 4월 28일 자정에 일가족을 쏴 죽인 뒤 본인도 자결하였고, 대통령

 

이승만은 5월 29일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하여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8월,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대

 

통령에 당선되고 신파인 장면이 총리로 내정되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이 정도 대규모의 민중 시위는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 정도를 들 수 있겠지만, 앞서의 두 운

 

동은 일차적으로 당대에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4.19는 시민의 손을 들어주었다. 일제와 6.25를 경험한 이

 

대부분이었던 시민들은 처음 주어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자유를 만끽했다. 이 흥분의 소용돌이 안에, 그

 

이 서울대 법대를 중퇴하고 군의 장교로 복무 중이던 스물네 살의 최인훈이 있었다.

 

 

 

 

 

 

 

 

최인훈

 

 

 

4.19가 최인훈에게 미친 강렬한 영향은 저자 본인이 육성으로 남긴 바 있다.

 

 

 

구정권 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

 

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광장> 초판 서문 중)

 

 

 

마침내 찾아온,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해도 되는 자유. 60년 여름의 두 달 동안 최인훈은 한 편의 소설을 집필하

 

고 그 결과물을 <새벽> 10-11월 호에 게재하였다. 제목은 <광장>. 주인공은 1954년 남과 북 모두를 거부하

 

고 인도행 배에 몸을 실었던 88명 중 한 명이었다. 최인훈은 그에게 '이명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광장>은 인도행 배인 '타고르'호에 승선 중인 이명준이 중립국으로 가기 위한 선상에서 남과 북에서 겪었던 지

 

난 일들을 회상하는 액자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해방과 6.25를 거치며 남한 사회와 북한 사회로부터 철저하

 

게 버림받았던 그의 이십 대. 최인훈은 이명준의 입을 빌어 남한 사회와 북한 사회의 실상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비판한다. 이 때 북한 사회를 환멸하는 데 비유로 쓰인 용어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광장'이며 남한 사회를 비

 

하는 데 쓰인 용어가 '밀실'이다.

 

 

 

양측 모두 자신의 체제를 옹호하고 서로를 힐난하기에 바쁘지만, 이명준의 눈에 비친 남한과 북한은 모두 모순

 

투성이의 사회였다. 그 중 어디에도 발을 붙이고 싶지 않았던 명준은 제 3의 길을 택했고, 그 길로 가는 중인 타

 

고르 호의 선상에서 바다에 몸을 던진다.

 

 

 

<광장>이 나오기 전까지 50년대의 소설들은 '전후 소설', 혹은 '반공 소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전쟁의 참혹

 

과 인간성 상실의 폭로는 전쟁 후 나오는 예술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천

 

일률적으로 같은 뉘앙스의 작품이 나오고, 그 작품들 중 일부가 때로 부당한 체제의 호위병으로 쓰이게 된다

 

분명한 문제가 된다.

 

 

 

<광장>은 이러한 이념적 분열에 균열을 가하고,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격하는 사회 속에서 실종

 

되어 있던 '주체'를 확인시켰다. 이후로 현대 소설은 마침내 이념의 주박에서 풀려나 자신의 발로 전진을 시작하

 

게 된다. 소재와 주제 의식, 집필과 발표 시기, 그리고 문학적 의의에 있어 <광장>은 짝을 찾기 어려운 걸작이었

 

다. 그것이 아마도 발표된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방 후 최고의 문학'으로 꼽히는 한편 100쇄를 넘기는 상

 

업적 성공 또한 거두게 된 동력원일 것이다.

 

 

 

1960년, 시민은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쟁취하고 <광장>이라는 옥동자까지 받아내었다. 일본의 식민통치와 3년

 

간의 내전까지 겪은 나라에서 십 년도 지나지 않아 성공한 시민 혁명이 등장한 것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61년 5월 16일,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한국 사회는 기나긴 침묵

 

의 시기로 진입하게 된다.

 

 

 

 

 

 

 

6.25로 시작하여 4.19에서 완성된 <광장>. 그래서 나는 해방 후 현대소설을 설명할 때 반드시 <광장>으로 강의

 

를 시작한다. 작품 자체가 갖는 문학적 성취도 뛰어나지만, 소설은 사회의 반영이라는 시각을 이만큼 잘 보여주

 

는 작품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53주년을 맞은 4.19에, 그 연원을 소개하거나 의의를 분석하는 기사 하나 올

 

라온 데가 없어 서운해 하다가 평소의 강의록을 정리해 올려둔다. 오늘 최인훈 선생님은 무엇을 하고 지내셨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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