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년 전쯤 소개했던 '숭례문'에 이어 또 한 번 선물받은 레고 아키텍쳐 시리즈. 제품번호 21003번인 시애틀의
스페이스 니들이다. 아키텍쳐 시리즈 중에서는 소형으로 초기 제품군 중 하나인데,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 제품
때문에 이 시리즈에 흥미를 갖게 됐다. 죽기 전에 미국에 가는 일이 없더라도 나는 딱히 유감이 없지만, 만약 가
게 된다면 아마도 록키 산맥과 이 스페이스 니들 때문일 것이다.
왼쪽은 박스, 오른쪽은 설명서. 레고의 가장 기본적인 부품들로 간략하게 표현해 냈으면서 가격은 낮지 않아
일명 가성비, 즉 가격대 성능비가 좋지 않기로 이름난 아키텍쳐 시리즈이지만, 박스와 설명서 만큼은 불만을
토하기가 어렵다. 적당한 크기와 빠닥빠닥한 재질.
구도를 달리 하여 몇 장 찍어 봤는데, 구도를 다르게 한 의도가 별로 드러나지 않아서, 새로 받은 사진 어플로 장
난을 좀 쳐 봤다. 첫 번째 사진은 제품과 눈높이를 맞추고 찍은 것. 크기는 성인 남성의 한 뼘을 조금 넘는 정도
이며 실제 색깔은 흔히 보셨을 레고 브릭의 회색 그대로이다.
숭례문 리뷰에서도 언급했었지만, 아키텍쳐 시리즈의 설명서에는 해당 제품의 모델이 되는 건물의 연원과 제원
이 설명되어 있다. 설명서에 의하면, 스페이스 니들은 1962년 세계 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건축
기간이 열두 달 밖에 없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스페이스 니들의 각 부분을은 따로 만들어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레고의 조립법과 동일한 것이 재미가 있다.
'미래'의 느낌을 주기 위해, 디자이너인 Edward E. Carlson은 탑 상층부의 전망대를 비행접시 모양으로 스케치하
였다. 큰 돈이 들어가는 공사에 이런 파격적인 디자인이 허락된 1960년대 미국의 분위기도 흥미롭고, 복잡하게
디자인된 실제 모델의 모습을 접시 모양 부품 서너 개와 톱니바퀴 부품 하나로 띡 표현해 낸 제품의 모습도 재미
있다. 모두 실제 레고 제품에서 빈번하게 쓰이고 있는 부품들이다.
비행접시의 느낌을 더 살리고 싶었던 것인지 이 전망대는 47분에 한 바퀴를 회전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힘은 오
직 1마력짜리 모터 한 대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제품의 가격대 성능비를 아키텍쳐 제품군 중 최악의 수준으로 만들어 버린 몸통 부분. 브릭을 차곡차곡 쌓아
서 외형을 갖춰 나가는 타 제품들과 달리 이 제품은 '빔'이라고 부르는 연질의 플라스틱 봉 세개로 곡면의 몸통
을 표현해 냈다. 실제로 같은 가격대의 다른 제품의 박스들을 들어보면 제법 무게가 있고 덜그럭덜그럭 소리가
나는데 비해 이 제품의 박스는 무척 가볍고 흔들어 보면 이따금 달그락 소리가 난다.
하지만 부품이 몇 개가 들었든 결과물을 만들어 놓고 보면 불평을 잊게 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레고 제품의
가장 큰 미학은 생략과 왜곡에 있다. 그래서 나는 아주 많은 부품을 써서 최대한 원래의 모델과 흡사해 보이려
애쓰는 거대 제품군 보다는 차라리 원래 디자인의 주요한 특성만을 따 과감하게 비틀고 그 간극은 상상력으로
채우도록 하는 제품군 쪽이 훨씬 더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제품이 그렇다. 그 중에서도 원래의 모델보
다 훨씬 아름다운, 몇 안 되는 경우에 속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오랜만에 조립의 손맛을 원했던 입장에서야 아쉽기 그지 없지만 전시 효과가 워낙 좋아 흐뭇하게 웃게 된다. 얌
전한 색깔과 '미래적'인 디자인, 쉬운 조립과 뛰어난 전시 효과 등을 고려해 보면 레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
게도 충분히 선물로 건넬 만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