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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박창주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도망치는 꿈을 꾸었다. 장소는 을씨년스럽고 넓은 황야에 학교와 비슷한 건물이 여러 채 서 있는 곳이었다. 황야 밖으로 계속해서 달려 나가면 어딘가에 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꿈 속에서는 오직 건물들만이 안전한 곳이라고 여겨졌다. 한 건물에서 나가 다른 건물로 달리는 도중이라든지, 건물 내의 복도에서 꺾어질 때라든지 하는 순간마다 일행 중의 한 명씩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 한 명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중인지 모두 알 수 없 었지만, 아무튼 도망치지 않으면 나도 사라지게 될 것이고, 사라지고 난 뒤에는 아주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될 것 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낮부터 시작해서 해가 다 지고 난 뒤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긴 시간 달렸지만 내내 공포로 .. 더보기
강남역 지하도를 걷다가 앗, 샤넬이 세일을 하다니, 선물용으로 사 놓을까, 아니 그런데 샤넬이 왜 세일을 하지 하며 다가가보니 정체는 샤넬이 아니고 샤빌. 샤빌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샤넬로 읽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다시 샤넬로도 보이 는 신통방통 브랜드. 지하 상가 사장님의 재기발랄한 오마쥬일까 싶어 찾아보니 대기업 쌍방울의 브랜드. 그러 고 보니 브랜드 로고의 서체는 어쩐지 신세계의 그것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대놓고 표절했다는 혐의는 고소가 무서워 차마 못 가하겠지마는, 아무튼 근래 본 것 중에 아무래도 가장 수상쩍 은 브랜드. 일부러 착시를 노린 기획이었다고 하면 나는 귀엽게 여길 것 같기는 하다. 더보기
여름 길었던 장마가 한차례 그친 대낮, 땀을 뻘뻘 흘리며 책상 앞에 앉아 번역을 하고 있다가 묵혀 두었던 은행 일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기억해야 할 잡무가 많았기 때문에, 뙤약볕 아래를 걷다가 잊지 않도록 오늘의 할 일 목록을 중얼중얼거리면서 집을 나섰다. 한참 걷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대문 앞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려 고 들고 나갔던 사과 찌꺼기는 그대로 손에 있고 은행 카드는 책상 위에 두고 나온 채였다. 오래전의 만화인 '멋 지다! 마사루'에서 주인공 마사루가 맥주병을 신고 걷고 있다가 옆사람이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같이 놀라며 신발인 줄 알고 신었다고 외치던 장면이 떠올랐다. 더보기
은행에 가면 빈 봉투도 있고. 더보기
일상 시네마 이 장면은 흡사 오마쥬인가. 한참 눈을 마주치더니 자리차고 앉았다. 내가 고양이를 관람하는가 고양이가 나를 관람하는가. 더보기
꿈의 코스튬은 이제는 케이블에서도 잘 안 틀어주지만, 로스트가 나오고 브레이킹 배드가 나오고 왕좌의 게임이 나와도 30대 이상의 많은 이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최고의 미드 중 하나로 남아 있을 NBC의 'FRIENDS'. 위 사진은 여주인공 들 가운데 가장 많은 남성 팬을 거느리고 있었던 '레이첼Rachel' 캐릭터가 남자친구인 '로스Ross'의 판타지를 충 족시켜 주기 위해 영화 스타워즈의 레이아 공주가 입었던 금색 비키니를 입고 나타나는 씬이다. 이것이 (이제는 잊혀진) 전설의 'Princess Leia in the gold bikini' 씬. 96 - 97년에 방영된 3시즌 중의 에피소드이니 십오 년도 훨씬 넘은 일이라 나조차도 잊고 살다가, 우연히 인터 넷에 자료로 올라온 영화 '우뢰매'를 다운받아 보고서 기억이.. 더보기
아아 빨래는 어찌하리잇고 나난. 더보기
여름 맞이 깜짝 이벤트 사실은 일기를 쓰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러나 요사이 일기가 뜸한 또 하나의 이유는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왕좌의 게임 때문이기도 하다. 일기를 쓸 때의 여러가지 원칙이 있지만, 십 년이 넘게 블 로그를 운영해 오며 지키고 있는 몇 개의 대원칙 가운데 하나는 화자의 스탠스를 분명히 할 것, 이다. 비평가가 됐든 풍류객이 됐든 사기꾼이 됐든, 뭐든지 간에 하나로 정해두어서 글이 하나의 수원(水源)에서 흘러나오도록 할 것. 그날 일기를 쓰고 있는 화자의 왕좌에는 단 한 명만이 앉아 있도록 할 것.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 교사와 제자 사이로 만났던 독자들의 유입이 갑작스레 늘었다. 이 또한 지나갈 일이지마 는 지나가기 전까지는 어쨌든 현재형이다. 제자들의 모호한 찬사에 떠밀려, 자연.. 더보기
제자들에게 물이라는 것은, 가다가 웅덩이를 만나면 그 웅덩이를 다 채우고 나서야 다시 흘러 큰 바다[四海]로 나아간다. 당장에 무용해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생에는 훗날의 언젠가를 위해 묵묵히 채워야만 하는 시간들이 있다. 오후 무렵 홈페이지에 갑작스레 방문 수가 늘어나서 무슨 영문인가 추리를 해 보았는데,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지난 학기 강의를 했던 고등학교의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라는 사실이었다. 맞는지 아닌지야 알 수 없 는 노릇이지만, 틀린 추리라 할지라도 힘든 시험을 끝내고 연어처럼 선생에게 돌아오는 제자들에게 도움 되는 한 마디를 보내는 것이 무어 해가 되랴 싶어, 마침 공부를 하고 있던 맹자 중의 한 귀절을 뽑아 붓으로 쓰고 간 단한 그림을 그렸다. 고등학교 2학년, 인간으로서 보내는 그들의 마지.. 더보기
소래포구 아버지의 생신이 있는 달이라, 서로 한가한 주말을 골라 고향 인천에 다녀왔다. 본가가 있는 인천 안쪽에서는 꽤 먼 거리이지만, 아들이 오랜만에 내려왔다고 부러 소래까지 데려가 주셨다. 콧물을 흘리며 두리번거리던 이십여 년 전에는 꼬마의 눈에도 무척이나 투박한 광경의 장소였는데, 어느새 관광 명소라고 해도 좋을 수준이 되어 있 었다. 찍었던 사진들 가운데 몇 장을 골라 기록 삼아 남겨둔다. 분명히 의도가 있는 시선인 것 같은데 그 의도를 알 수가 없다. 나는 바로 이 머리의 각도 때문에 조류를 싫어한 다. 저 새들 중 한 마리가 우리집 김 여사의 어깨에 똥을 쌌다. 엄마는 새똥을 맞은 것이 난생 처음이라 했다. 이십 대의 후반에 이역만리 인도까지 가서 처음 새똥을 맞아보았던 나는, 그 정도면 복된 인생이십.. 더보기
c일보 가방을 둘러메고 방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는데,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하고 묻자 잠 시만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문을 빼꼼 열어보니, 반팔 와이셔츠에 잘 다린 정장 바지를 입은 사십대 중반의 남자가 대뜸 내게 사진의 것처럼 세로로 트인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서는 세 장의 지폐가 부채꼴을 이루며 몸 을 반쯤 드러내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봉투를 쳐다보다가 다시 그의 눈을 쳐다보자,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색한 웃음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OO일보예요. 보시라는 게 아니고, 잘 봐달라고. 받아 두세요. 언론을 통해 수십 수백 차례나 접해왔던 사례인데도, 막상 그 상황이 닥치니 머리와 몸은 허둥거렸다. 눈길을 조 금 내려 그의 가슴께를 보던 나는 더듬거리며 이렇.. 더보기
LEGO 21015 피사의 사탑 시애틀 스페이스 니들과 서울 숭례문의 레고 모델을 선물 받았던 건축 소녀로부터, 레고 아키텍쳐 시리즈의 다 른 모델인 '피사의 사탑'을 받았다. 예상 못하던 선물이라 깜짝 놀랐다. 있던 레고 제품을 분해해서 신품이라 생 각하며 다시 조립하는 정신 승리의 놀이 말고 말 그대로의 신상을 뜯어 조립하는 것은 오랜만의 일. 얼른 조립하 자. 들썩들썩. 반찬통 같은 사은품일랑 빼고 박스 크기를 줄여달라는 것은 진성당원 레고 팬들의 오랜 불만이건만. 한두 개 생 길 때에는 남는 부품도 넣어 두고 해서 그런대로 쓸모가 있었는데 쌓이다 보니 대책없다. 진짜 반찬을 넣자니 반 찬도 없고. 믿고 보는 아키텍쳐 시리즈 조립설명서. 부품수에 비해 좀 터무니없는 가격에 일조하는 요인 중 하나이겠지만, 그래도 손에 쥐고보면 고급.. 더보기
종강 마음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다. 수업을 듣는 입장일 때에는 아무리 재미없고 관심이 가지 않던 강의라도 마지막 시간에는 저마다 나름의 소회가 생기는데, 강의를 하는 입장이 되고 보면 무척 인상깊고 즐거웠던 수업이라 할 지라도 마지막 퇴근길 또한 여느날의 퇴근길과 마찬가지로 저녁 반찬에 대한 고민 이상의 무엇이 생기기 어렵 다. 굳이 더 꼽아보아도 다음 학기까지는 출근 안 하네 정도가 다일텐데. 이번 학기에는 전반기에 두 반, 하반기에 두 반, 총 네 반을 가르쳤다. 그 중 하반기에 강의를 했던 두 반 중 한 반의 학생들이, 1학기의 마지막 강의였던 오늘, 수업이 끝난 뒤 선물로 롤링페이퍼와 호두파운드 롤케익을 주 었다. 실력으로야 일천하지만, 마음의 경력으로라면야 음식 선물 정도에 일희일비하는 시점은 참여.. 더보기
서울에서 나이 서른셋에 제약회사의 전무가 되게 되었다. 삼 년 전, 제약회사 회장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회장의 딸 은 재혼이었다. 노리고 만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결혼이었다 생각했다. 장인이자 회장은 전무가 되기 전 일주일의 휴가를 주었다. 딱히 갈 곳이 없어 고향엘 갔다. 고향도 서울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서울이 아닌 주제에 서울이 되고 싶어 발버둥치는 것은 오히려 서울만 못 했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 후배는 순박하기 짝이 없어 한심했고, 일찍 세무서장이 된 친구는 적어도 고향에서는 갑 중의 갑인 자신의 처지가 서울에서의 성공보다 결코 못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 갖은 거드름을 다 피웠다. 여자를 만났다. 순박한 후배로부터는 러브레터를 받았고, 세무서장인 친구와는 자는 사이인 여자였다... 더보기
한밤중 더보기
버스 안에서 더보기
느긋 (김지하, 1986) - 유홍준 교수의 김지하 난초론 (총 4편. 2001. 12. 07. - 12. 11. 프레시안 게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11206183801&Section=04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11207120947&Section=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11207164533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11207164942 더보기
병문안 더보기
슬픈 인연 학교 옆에 살고 있고 고향은 인천이라 내 소유의 탈 것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가, 몇 년 전 갑작스런 사춘 기처럼 오토바이에 흥미가 생겼던 때가 있었다. 자태를 뽐내는 사진들을 누비다가 마침내 만난 첫사랑은 일본에 서 온 벤리라 했다. 편리(便利)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라는데 일본말 같기도 하고 이탈리아 말 같기도 한 묘한 어감까지 마음에 들었다. 벤리는 팔색조였다. 제일 흔한 흰 색 말고도 이런 색이나 이런 색을 입을줄도 알았다. 모두 잘 어울렸지만, 내 마음을 전량 인출해 간 것은 빨간 드레스. 예쁜 것만 해도 귀한데 출시량도 많지 않아 몸이 달아 못 살 지경이었다. 그냥 길가에 세워 놓아도 이런 자태. 다른 사람들은 그냥 예뻐 보여서 예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더 욱 예뻐 보이는 이.. 더보기
모닝 콜 참고할 것이 있어 정미년인 1667년의 현종실록을 뒤지다가, 밤을 새는 바람에 뻑뻑해진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기사가 있어 옮겨 적는다. 짧은 글이지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현종 14권, 8년, (1667 정미년/ 청나라 강희 6년) 8월 6일 무인戊寅일 배천에서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한 머리에 몸이 두 개였다. 나는 이런 류의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보는 족족 모으는 편이라 웬만한 기록을 보고서는 딱히 놀라거나 하 지는 않는데, 비슷한 이야기라도 개인 문집에서 보는 것과 조선왕조실록에서 보는 것은 확실히 임팩트의 차이가 있다. 실록에도 이런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나오니 이 참에 카테고리를 하나 만들어 하나씩 주워다 쟁여 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더보기
출근길 할 일이 많았던 탓에 여유를 많이 두지 않고 출발한 출근길. 밥 먹는 시간을 아껴 나가는 길에 빵이라도 사먹으 려는 요량이었는데, 은행에 들렀다 가느라 평소의 출퇴근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걷다 보니 흔한 프랜차이즈 빵집 하나 눈에 띄질 않는다. 와중 최근 비싼 커피숍과 부띠끄가 연이어 들어서는 연희동 뒷골목의 뜬금없는 틈새 분식집 발견. 건물의 짜투리를 활용한 테이크아웃 가게인 것 같은데, 막상 계산대 앞에 서서 둘러보니 집 냄비 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떡볶이에 한켠에는 순대, 튀김, 수제 소시지까지 없는 게 없다. 그 중에 골라든 것은 컵에 든 닭강정을 가리키는 컵강정. 박스에 담아 파는 중자는 칠천 원, 대자는 만 원이고 컵 에 담아 파는 것은 이천 원이다. 닭을 좋아하기도 하고 들고가며 잽싸게 먹기.. 더보기
이것이 성실함이다 사진 속 이상한 부분을 찾아보세요. 정답은 손등에 그려진 정체불명의 헤나. 사실은 '저희나라'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학생에게 '우리나라'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해당 학생이 피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파 넣은 문신. 나는 그 성실함에 감읍하며 속으로만 눈 물을 따라 흘렸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교육이 실은 교사에게 지복(至福)임을 새삼 깨닫게 하는 때일 것이다. 더보기
야밤 낙서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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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랑달랑 도서관에서 외솔관으로 가는 길에, 입에 무언가를 물고 가는 고양이를 만났다. 참새라도 잡았나, 생각하다가 가 까이 가서 보니, 고운 황갈빛의 새끼가 어미의 입에 목덜미를 맡긴 채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새끼의 몸은 어미의 걸음걸이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팽글팽글 돌았는데, 한 순간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 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어쩐지 생명의 정체를 들여다 본 노승의 눈빛에 쏘인 듯하여 가슴이 덜컥했다. 십여 년 재학 중에 처음보는 광경이라 무척이나 신기해 하다가, 외솔관에서 볼일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른 새끼를 나르는 모습과 다시 마주쳤다. 며칠 전의 갑작스런 폭우에도 잘 살아남았구나, 하고 괜스리 엄 숙한 마음이 들었다. 더보기
어머나 거주는 연희동, 활동은 강남역, 가무는 홍대 앞인데도 유명인 한 번 못 만나 본 반쪽짜리 서울시민 신세. 본적이 인천이어서 그런 것일까 하고 멍청한 원망을 하는 와중에 단골 찻집에서 유명인 만났다. 오명가명 보신 본이야 어디서 본듯한 인상에 불과하겠지만 강연이나 토론 프로그램을 챙겨 보는 사람에게는 수퍼스타 반열인 김남훈 씨. 프로레슬러이자 스타 강사, 사회 및 정치 평론가까지 다방면으로 활약하고 있는 진보 계열의 인사이다. 사실은 찻집의 창문 밖에서 실루엣만을 보고도, 어, 김남훈 씨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TV 프로그램에서도 다른 출연자들과 신체의 비율 자체가 달라 또 하나의 재미로 삼으며 시청하곤 했는데, 실제로 보니 압도적이었 다. 평소에 호감을 갖고 있었던 터라, 구석에 앉아 내 할 일 하.. 더보기
이찌방 라이방 평일에 나가는 고등학교 방과후 수업의 강의는 오후 네 시에 시작해서 다섯 시 십 분에 끝난다. 몇 주 전만 해도 퇴근 버스를 타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문득 흐른 침에 놀라며 차창 밖을 보면 해가 뉘엿뉘엿 져가고 있었는데, 이제는 집에 들어와 손발을 닦고 앉아도 방 안이 밝다. 그 핑계를 대고, 선물로 받았으나 귀하기도 하고 평생에 써 본 적이 없어 창피하기도 해서 고이 모셔두었던 라이방을 꺼내봤다. 밤새 번역이나 입력 작업을 한 뒤에는 훨 씬 큰 뿔테 안경을 쓰고 다니기도 하니 콧등 위의 무게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선그라스 하나를 쓴 것 뿐인 데, 괜한 웃음이 비직비직 새어나오고, 마치 이십 년치 연봉을 퇴직금으로 받아서 세계를 떠도는 여행객처럼 이 사람 저사람에게 상냥한 인사를 건네 보고도 싶다.. 더보기
여름날 읽던 책이 얼마 안 남아서 한 장만 더, 한 장만 더 하고 읽다가 강의하러 갈 시간이 다 됐다. 밥과 반찬을 차리고 치우고 할 시간이 안 되는 통에,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 카레 고로케를 샀다. 가게 앞에 뿌려놓은 수돗 물에서 바작바작 소리가 나는 것 같은 한낮. 패딩 잠바를 입고도 감기 걱정을 하던 몇 주 전의 모습일랑은 간데 없고 날은 개불알 늘어지는 여름날. 물 한 모금 마시고 워석워석 고로케를 베어무는데, 이름모를 빵 한 조각과 물 한 통 들고서는 가이드북 따라 인도의 시내를 활보하던 때가 떠올랐다. 갑작스런 더위에 새로 입은 티셔츠가 금세 젖었지마는 불평의 마음 한 조각 없이, 이렇게 싼 값에 추억이 떠오르다니, 하고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그 나저나 인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더보기
최대호 님은? 이 블로그를 쭉 읽어오신 분이라면 잘 알고 있을 내용이다. 카테고리에 독후감을 올리면, 인터넷 서 점 반디앤루니스에서 포털 DAUM과 함께 매 주마다 열 편씩을 뽑아 게시하고 부상을 주는 '반디 앤 뷰 어워드'에 이따금 선정될 때가 있다. 부상은 반디앤루니스의 적립금 형태로 지급받게 되는데, 5만 원인 1등은 한 차례 뿐이 었고, 그 외의 횟수에는 2등부터 10등까지 균일하게 주는 5천 원을 받았다. 그간 받은 적립금을 더하면 십만 원 가량이 된다. 액수로만 보자면 적은 돈은 아니지만 마음먹으면 지갑에서 꺼낼 수 없는 액수도 아니다. 하지만 그 십만 원의 과정은 정말이지 뛸듯이 기쁜 한 번 한 번이었다. 상 받을 일은 둘째치고 입발린 칭찬이라도 듣기가 어려워진 서른 이후라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 .. 더보기
어린이날 자고 일어나 보니 머리맡 메일함에 선물이. 신고자는 이제는 정분 날까 두려운 그 이름, '한국인터넷 선교네트워 크'이다. 2011년 말, MBC 시사프로그램 은 한 해 동안 방송했던 프로그램들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열 편 남짓 을 골라 'PD수첩이 목격한 2011' 편을 방송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방송의 화면을 캡쳐하고 주된 주장을 옮기 는 한편 언론사에서 관련 기사들을 검색해 추가 정보, 혹은 다른 시각을 얽어 총 다섯 편의 일기를 올린 바 있었 다. 이번 신고의 대상이 된 기사물은 두 번째 묶음으로, 심형래 씨의 회사인 '영구아트'가 파산하는 과정을 그린 '영 구의 몰락' 편과,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내부적 문제를 다룬 '누구를 위한 교회인가', 그리고 구제역 파동과 그 대처법을 둘러싼 논란을 다루..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