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

2021년 오랜만에 쓰는 일기이다. 이따금 올렸던 부고를 제하고는 사오 년만의 기록이다. 생각해보니 일상적인 문자 정도를 제하고는 일기를 포함해 어떤 글이든 쓴 지 오래 되었다. '일기' 카테고리의 연도를 클릭해보면 그 해에 쓴 일기의 총 갯수를 볼 수 있다. 살펴보니 서른이 넘어서는 이미 글이 꾸준히 줄고 있었다. 그 맘때쯤 쓸 것이 없었다든지 그 맘때쯤 사는 것에 치여서 그렇다든지 하는 생각을 편린적으로 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이미 오래 된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고 있는가. 나는 왜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인가.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 나는 누구인가. 모두 중요한 질문이었는데 개중 하나라도 대답하기에는 깜냥이 안 됐다. 관련된 지식은 일천했고 도움이 될 경험들은 꼬여서 몸에 .. 더보기
노회찬 (1956-2018) 말에는 크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과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형식이 있다. 충실한 내용이 있어도 형식이 소략하면 거친 말이 되고 형식은 화려하되 내용이 공허하면 간교한 말이 된다. 내용과 형식이 모두 갖추어진 말은 그 외의 장식 없이도 충분한 영향력을 갖는다. 비유하면 한 끼로 든든한 백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그 위에 유효한 맥락이나 비유, 유머 등의 장치를 활용하는 전략까지 더해진 말은 상찬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다. 듣고 접한 정치인 가운데 말이란 무엇인가 뿐 아니라 말에서의 유머란 전략은 무엇인가를 가장 잘 꿰뚫어 보고 나아가 훌륭한 활용까지 실천해 낸 인물인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금일인 2018년 7월 23일 서울 중구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경찰은 자필로 작성된 유서가 발견되었.. 더보기
2017. 10. 20. 쥐순이. 오랜만에 쓰는 일기이다. 팟캐스트 은 구성원의 변화로 인해 정리를 했다. 손꼽게 즐거운 시간이었던 만큼, 예전만큼 즐겁지 않은데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것은 자신에게나 결과물로서나 좋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지금도 이따금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이전에 올렸던 에피소드들을 자기 전에 한 차례씩 듣는다. 어떤 것은 무척 재미있어서 듣다가 몇 시간이 지나는 수도 있다. 고양이와 함께 하는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난 글에서 소개했던 첫 고양이 흰둥이를 들인 뒤, 몇 달의 격차를 두고 샴 고양이 한 마리와 러시안블루 고양이 한 마리를 차례로 데려왔다. 집 안을 가득 채운 철제 캐비닛에 수십 마리의 고양이를 가둬 놓고 키우는 곳에서 비실거리는 모습이 눈이 밟혀 데려온 러시안블루 고양이는, 데려온 지 열흘이 .. 더보기
흰둥이 그러나 흰둥이는 겁보였다. 선생님이 처음 발견하고 구조를 할 때에도 도망갈 수 없는 구석에 몰린 뒤로는 발톱이 다 닳고 사이에 피가 맺히도록 바닥이나 벽을 긁어대었다 한다. 새로운 장소에 가면 며칠이고 구석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고양이의 일반적인 습성이라 하지만 흰둥이는 함께 지낸 지 몇 달이 지난 지금도 내가 밖에 나갔다가 새 냄새를 묻히고 돌아오면 어두운 구석에 숨어 한참이나 눈치를 본다.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나면 아니나 다를까 구석에 가서 숨어 있다. 하루의 대부분을 숨어서 자고 있고, 밥을 먹거나 화장실에 가는 것은 내가 없을 때를 이용하는 것 같았다. 두근두근 기대하던 쟈미난 생활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전까지 내가 혼자 살던 삶과 별로 달라지던 것도 없어서.. 더보기
고양이 반 년 전에 썼던 일기와 같이, 중곡동에 은거하는 일상에 큰 변화도 없거니와 영글은 생각들은 운영하는 팟캐스트에서 대본으로 말로 충분히 풀어내고 있어서, 일기에 딱히 쓸 것이 없다. 작년인 2016년의 여름에 한 번, 최근인 2017년 1월에 한 번 해서 두 번이나 교토에 다녀온 것은 개별의 일기로 쓸 것이 아니라 잘 갈무리해 하나의 컨텐츠로 묶어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와중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고양이를 키우게 된 것을 꼽을 수 있겠다. 넘의 집 전세 얹혀 살고 있는 처지에 활동력 좋고 밤낮으로 짖는 개는 어차피 키울 수가 없었다. 그러한 현실적인 이유 말고도 고시원 쪽방 생활을 할 때부터 개보다는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우고 싶다는 개인적인 취향을 가져오던 차였다. 변곡점을 만난 것은 팟캐스트의 음악 감독.. 더보기
또 신고 독후감 한 편으로 도대체 몇 번의 신고를 당했는지 모르겠다. 신고 주체는 지난번과 같은 주식회사 산타크루즈캐스팅컴퍼니. '잊힐 권리'를 근거로 해서 신고 주체를 대리하여 인터넷 게시물에 대한 지속적인 신고로 결국 게시물 차단을 유도하는 업체인데, 특정 범죄의 피해자 등이 사건과 관련된 기억조차 떠올리고 싶지 않을 때 같은 경우에는 인권을 구제하는 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처럼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해 피해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단지 이름이 언급되었거나 혹은 건조한 문학 비평에 지나지 않는데도 신고를 일삼는 데에는 눈쌀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지난번까지는 독후감 게시물 자체가 신고의 대상이었고 신고 주체도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의 대리인인 산타크루즈캐스팅컴퍼니였던 것.. 더보기
팟캐스트는 순항 중 막 시작한 팟캐스트 . 아직까지는 듣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딱히 욕 먹는 일도 없고, 하던대로 그대로 하면 그만이다. 12회차의 녹음을 막 마치고 난 지금, 온라인 상에는 3회 편까지 업로드가 되었다. 4회인 이창동의 편 업로드를 앞두고, 페이스북의 홍보 페이지 운영을 맡고 있는 복탱이가 이번주에 다룰 작품의 제목만이라도 미리 소개하고 싶으니 관련된 이미지를 좀 보내달라 하여, 오랜만에 글씨를 썼다. 종이를 불태우는 할머니의 손을 그려볼까, 하늘로 나풀나풀 올라가는 종이조각을 그려볼까 하다가 영 이미지가 잡히지 않아, 불꽃에 일렁일렁거리는 듯한 심상으로 원래 제목만 그대로 썼다. 큰 종이를 펴고 먹물종지를 씻고 하는 과정이 귀찮아 갱지 재질의 연습장에 굵은 마커로 덧대어 썼는데 게으른 시도 치고는 마음에.. 더보기
팟캐스트 프로그램 '방과후 수업' 런칭 오랫동안 준비해 온 팟캐스트 프로그램 '방과후 수업'이 9월 22일인 이번주 목요일에 런칭된다. 지금은 시범적으로 안드로이드용 팟캐스트 사이트 '팟빵'에 프롤로그격인 0화가 하나 올라가 있다. 애플 팟캐스트는 프로그램 심의를 거치는 과정이 있어서 목요일 런칭에 0화와 1화가 함께 올라갈 예정이다. 무언가를 만들어 보자고 몇 명의 사람이 모인 뒤, 비디오 프로그램은 팀웍과 각자의 역량이 좀 더 쌓인 뒤 도전해 보기로 하고 첫 걸음은 오디오 프로그램으로 가 보자고 결정한 것이 열 달쯤 전의 일이다. 학부 내내 학기마다 한 편씩 연극을 올리면서 여러 사람과 뒤섞여 두어달 연습을 하고 그 중의 누구는 팜플렛을 만들고 그 중의 누구는 무대를 쌓고 하던 그 일들을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 냈었단 말인가, 싶을 정도로.. 더보기
선운사 중간 과정을 자세히 적지는 않았지만, 올 여름 내의 런칭을 목적으로 지난 여덟아홉 달 동안 문학 팟캐스트 프로그램의 파일럿을 뜨고 있다는 사실은 간헐적으로 언급한 바 있었다. 블로그를 뜸하게 운영하는 것은 일기나 독후감 카테고리에 무슨 글을 어떻게 써야 하나 의문을 가진 채로 진전이 없는 것도 한 이유이겠지만, 실은 팟캐스트 프로그램의 연출, 대본, 출연까지 하다 보니 거기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충분히 풀어놓고 있는 것이 더 큰 이유라고 하겠다. 이번주에 녹음하는 8회차는 윤대녕의 인데, 대학교 초년생 때 열없는 얼굴로 휘휘 읽었던 것이 마지막 독서이고, 십수 년 만에 다시 읽으면서 보니 서른 여섯인 주인공의 나이와 어느덧 동갑이 되어있었다. 그만큼 더 읽히는 것이 있어 즐거웠고, 프로그램의 대본을 .. 더보기
이름을 찾아서 0. 집에서 시작은 단순했다. 다음 달인 8월, 불혹이 넘어간 사촌 형의 첫 일본 여행에 동행하게 된 나는 여행 준비를 하던 중 10년 짜리 내 여권의 만료 기간이 어느덧 가까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검색해 보니 만료 6개월 전의 여권은 일반적으로 효력을 갖지 않고, 국가에 따라 드물게 예외가 있긴 하지만 이 또한 여러가지 불편을 겪는다 하였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일본에 마침내 가게 되는 형을 위해 일단은 호기심 등은 제쳐두고 여권 재발급부터 받기로 했다. 군대에서 애면글면 월급 모아 제대하자마자 떠났던 첫 해외여행이 어느덧 십 년이 지났구나, 감회에 젖어 있다가, 앗 참 혹시, 하고 떠오르는 것이. 내 이름 대호의 영문 표기인 'DAIHO'에는 별다른 거부감이 .. 더보기
기념품 얼마 전 여행을 다녀온 일본 규슈에는 일주일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여행 사진은 대충 갈무리했지만 현지에서 사상자와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데 즐거운 기록을 남기는 것이 마음에 꺼려져 여행기는 후일로 미룬다. 오늘 쓰는 일기는 여행과 관련이 있긴 하지만 창작 활동의 일환이기도 해서 올린다. 짧은 여행인데다가 마땅히 살 것도 없고 해서 이번에는 나를 위한 기념품은 별로 안 사왔다. 다만 여행 중 크게 마음에 들었던 병 음료가 있어 그 뚜껑을 가져왔다. 병 뚜껑에 자석을 접착해서 냉장고에 붙이는 것을 본 일이 있기 때문이다. 왼쪽의 병 뚜껑은 유후인 지역에서 파는 '유후인 사이다'의 것이고 오른쪽은 맥주라면 종을 가리지 않고 대체로 안 좋아하는 내 입에도 꽤나 잘 맞았던 '유후인 맥주'의 것.. 더보기
유후인 가기 전날 밤 겨우내 자랐던 덥수룩 머리도 짧게 자르고, 하룻밤 자고 나면 일본 규슈의 온천으로 유명한 유후인으로 여행 간다. 6년째 쓰고 있어 방금 전에 모두 충전했어도 사진 몇 장 찍으면 툭 하고 꺼지는 내 아이폰 4. 일상의 사진이야 안 찍고 넘어가 일기까지 줄었지만 여행을 떠나면서 사진을 안 찍을 수는 없어 이번에는 카메라 들고 간다. 너무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라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실감이 안 나 시큰둥하였는데 전날 밤 여행가방을 꺼내고 옷을 개어 넣고 있자니 신이 났다. 세 번째 일본 여행. 안전하게 잘 다녀 오겠습니다. 더보기
강단에서 3월의 마지막에 쓰는 감상으로는 조금 때늦지만, 새 학기가 시작됐다. 내가 들어가는 방과후수업 강의는 3월 중순이 넘어서나 시작을 한다. 한 반에 4강씩 들어가서 열 반을 다 돌고 나면 한 학기가 끝난다. 같은 강의록을 들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교실에 서 있는데도, 한 해는 과연 지나 이제 새로운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구나 하고 첫 번째로 실감이 나는 것은 인사이다. 한 학기나 한 해가 끝나가서 모든 반에 못해도 한 번 씩은 들어간 뒤로는 복도를 걸어가며 인사를 받거나 수업 내용에 관한 질문을 받느라고 정신이 없다. 개중에는 수업을 열심히 듣던, 그래서 눈에 익은 얼굴들도 종종 있어 수시로 반가운 마음도 든다. 그러던 것이 몇 달 간의 겨울방학이 지나고 나면 출석부를 들고 사복을 입은 아저씨가 지나가니까.. 더보기
기타 올해에는 꼭 갖고 싶었던 물건이 두세 개 정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였던 마틴 백패커 기타를 선물받았다. 기타는 많은 시간이 들더라도 천천히 연습하여 남은 생의 주요한 취미 중 하나로 삼으려는 악기이다. 평범한 모양의 기타보다는 훨씬 작지만 우쿨렐레를 잡던 손에는 몸체도 지판도 널찍널찍하여서 버거운 재미가 있다. 좀처럼 틈이 나지 않아 기본 코드조차 연습할 시간이 없지만 일을 끝내고 의자에 축 처져 있다가 손을 뻗어 현을 몇 개 튕겨 보는 것 만으로도 힘이 나고 즐겁다. 고맙습니다. 더보기
'틈'이 없다. 틈이란 사이의 시간이다. 더 딱딱하게 정리하자면 목적이 정해진 시간 사이의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요즘에는 하다 못해 레벨업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때려부술 뿐인 게임을 하는 데에도 목적이 있다. 다른 일을 하다가 지친 머리를 쉬게 하기 위해서이다. 뜨개질로 모자를 뜨는 데에도 목적이 있다. 느지막히 결혼을 하여 첫 아이를 갖게 된 친구에게 신생아용 모자를 선물하기 위함이다. 회사원들보다 훨씬 넉넉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문득 앉아 계산해 보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등을 정리하고 났을 때 목적이 없는 시간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이것은 물리적인 진실이다. 그러니까 혼자 편안하게 잡상을 즐기고 그것을 갈무리해 일기장에 글로 남길 여유 또한 별로 없다. 요새.. 더보기
160214, <방과후 수업> 제 3회 녹음 내가 요새 가장 정력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은 가칭 이라는 팟캐스트의 준비이다. 정확한 런칭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아무튼 늦어도 상반기 내에는 결과물을 시장에 내놓으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무엇을 지향하는지, 어떤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는지 등등은 또 한 차례 정리하는 자리를 만들도록 하고. 오늘은 3회 녹음 날 음악감독 '맥주후요정'이 좋은 카메라를 가져와 현장 분위기를 잘 담아 주었기에 일기에 몇 장 올려둔다. 3회차 녹음에서 가장 큰 변화라면 지금까지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 스튜디오에서 행해오던 녹음을, 홈레코딩 시스템을 구입하여 중곡동의 내 집에서 시도해 보기로 한 것이다. 녹음 전날, 팟캐스트의 기술 감독을 맡고 있는 신각이와 함께 낙원 상가에 갔다. 여러 기능을 가진 믹서.. 더보기
같이 삽시다 중곡동의 유명한 중국요리 맛집. 교실 두 개쯤의 크기에다 주방 쪽에는 수 명의 배달 아저씨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너무 추워 주방에서 요리도 하기 싫던 어떤 날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가, 직접 방문해서 먹으면 천 원을 깎아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갖출 것은 다 갖춘 요리인데 천 원이 싸다니, 게다가 먹으러 왔다갔다 하면 소화도 잘 되고. 그 뒤로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에는 짬뽕을 먹으러 종종 들르게 됐는데. 설 연휴 중의 하루. 이어폰을 끼고 팟캐스트 방송을 듣는 내 귓전에 우렁우렁하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본 것은 다만 시끄러워서만이 아니라 내가 들은 소리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넓은 홀에 나처럼 혼자 짬뽕을 먹는 이가 둘 있었고 한가운데에 육십 줄로 .. 더보기
뜨개질하는 노인 연말 쯤부터 시작된 뜨개질은 틈이 나거나 머리가 아플 때에 계속된다. 뜨개질 하면서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은 왕년에 뜨개질 좀 했다 하는 이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스웨터나 후드티와 같이 대단히 어려운 옷까지 짠 이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목도리 뜨기에 다시금 재미를 붙였다는 나에게 선배들이 해 준 이야기는, 취미나 소일거리라면 그 쯤에서 멈추어라, 그 이상은 뜨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였다. 괜한 고생 말고 사서 편하게 쓰라는 말이겠지만. 아끼던 장갑 한 짝을 잃어버린 뒤로 영 마음이 시렸다. 거기에 혹한이 겹치고 자전거 출근이 겹치니 장갑이 없이는 못 견딜 지경이 된 것이다. 손가락 장갑 말고 벙어리 장갑 정도라면 지나치게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라도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겠지.. 더보기
교통사고 유년기 이후 내 자전거를 스스로 사서 다시 탄 지는 3년 쯤이 되어 간다. 미숙한 운동 신경 탓에 아무 것도 없는데 넘어지거나 뜬금 없이 방향을 틀어 옆의 전봇대 등을 박는 것 따위를 제외하고 타인의 실수로 사고가 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자동차는 골목에서 대로변으로 튀어나와 좌회전을 하려 했다. 나는 대로변 측의 인도에서 달려오다가 자동차의 지나치게 빠른 속도를 보고 급작스레 방향을 피하였으나 자동차는 그런 나를 보지도 않고 그대로 내 자전거의 뒤를 박고 6차선 도로 쪽으로 한참을 밀어부쳤다. 받히는 순간 차 쪽을 바라보니 운전자는 아래쪽을 보다가 접촉의 순간에야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내리면서도 아이구, 죄송합니다, 제가 전화가 와서, 등의 말을 하고 있었다. 자전거의 뒷바퀴와, 바퀴를 연결하는 차축.. 더보기
쇠귀 신영복 (1941-2016)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셨다. 2016년 1월 15일의 일이다. 선생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968년에 수감되어 1988년에 출소하였다. 이십 대 후반에 수감되어 긴 세월을 보내면서 좌절과 분노에만 사로잡히지 않고 동양철학에의 사유를 깊게 이룬 한편 재소자를 상대로 이루어지는 서예 교육에 열성을 보여 한글 글씨체의 일가를 이루기도 했다. 본디는 경제학과 출신이나 생애의 말기에는 몸담고 있는 성공회대의 수업에서는 물론 여러 사회 강연을 통해 생명과 동양철학에 바탕을 둔 깊이 있는 강의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수감되던 68년에는 둘째치고 선생이 출소하던 88년에도 나는 여즉 천둥벌거숭이라 선생의 이름도 몰랐다. 대학에 들어간 뒤로도 무엇을 했던 사람인지 아는 정도에 그쳤다. 선생의 말씀을 직접 읽게 된 .. 더보기
1월 첫째주 근황 집 근처의 시장에서 광어와 연어 회를 사다가 먹어봤다. 인천 사람이지만 나는 사실 회 맛을 잘 모른다. 가끔 먹으면 낯선 식감과 익숙한 초장 맛에 맛있나 보다 하고 쩝쩝 먹는 편이다. 이 날도 맛이 있었다. 일하는 곳은 대개 집에서 오 킬로미터 내에 있다. 몇 정거장 되지도 않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지루한 일이고, 또 이렇게라도 운동 한 번은 해야지 싶어 삭풍이 부는 날에도 자전거를 타고 댕긴다. 요새 들어 1차로는 자전거와 차량이 함께 통행하는 차선이라는 안내판이 여기저기 눈에 띄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경적 소리 얻어 먹는 찬밥 신세이긴 하다. 하기사 내가 운전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도 위태로운 마음에 상냥한 경고 삼아서라도 작은 경적 소리 한 번은 낼 것 같다. 여기 자동차가 지.. 더보기
12월 셋째주 주말 뭔 일이 없는데 무슨 일기를 쓴담, 하고 지내긴 하지마는 뭔 일이 없다고 안 쓰면 어느 세월에 쓰려고, 하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와중에, 그 때 그 때 읽은 책과 영화 제목을 적어놓은 친구의 기록을 보게 됐다. 그런 것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나한테는 둘째치고 자기 자신한테도 그게 무슨 재미가 있으랴 싶었다. 막상 보게 되니 남의 관람 및 독서기인데도, 맞아 이 해에 이 영화가 있었지, 이 책이 나왔었지, 하고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런 기록까지 쓰게 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집 밖에 나가서 한두 장이라도 사진을 찍은 날에는 일기를 좀 쓰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래서 쓰고 있는 12월 셋째주 토요일의 일기. 오랜 친구 빛나가 결혼을 했다. 연극부의 선후배로 만.. 더보기
취미 근황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광진구 중곡동으로 이사 오며 세웠던 목표 중에 하나. 문화센터의 프로그램 중 하나 이상을 꼭 들어보리라. 8월 말에 이사하자마자 광진구 문화센터 홈페이지를 찾아 검색을 해 보았다. 수영이나 피트니스 같은 체능 프로그램은 매 달마다 신청자를 받아 월 단위로 운영되는 반면, 캘러그래피나 양초 만들기와 같은 예능 프로그램은 석 달 마다 분기 단위로 운영되고 있었다. 8월부터 11월까지의 일정은 이미 진행 중이었고 중간에 가입은 불가능했다. 마침 가르치는 학생들의 중요한 수업도 많이 겹쳐있고 하여, 십일 월 말부터 신청을 받는 새 코스부터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이러구러 지내다보니 11월 말이 금세도 왔고 나는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살펴보다가 스트레칭과 우쿨렐레, 두 개의 강좌를 신청하.. 더보기
첫 녹음 전날 감기몸살의 여파가 있는 몸을 이끌고 토요일 아침 일찍 서초동의 국립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스튜디오 녹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우쿨렐레도 쳐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한다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은 학부 졸업 뒤로 적은 경험이었다. 일기에도 자주 등장하는 동생 신각이와 함께 이렇게도 구상해 보고 저렇게도 구상하기를 몇 년에, 올 여름 오랫동안 격조했던 동생 원준이를 다시 만나 계획에 힘이 붙었던 것이다. 원준이는 신각이와 마찬가지로 연극부의 후배이자 친동생처럼 아끼는 동생이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특별히 기대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우리의 구상에는 제한이 별로 없었다. 각종의 아이디어들을 수합하는 과정에서 크게 영상 아이템과 음성 아이템으로 구분이 되었고, 그 중 현실적으로 시.. 더보기
제자들에게 각별히 정이 들었던 기수의 제자들이 다음 주에 수학능력시험을 보러 간다. 딱히 해 줄 것이 없어 떡을 샀다. 흰 찰떡 한 상자, 콩찰떡 한 상자, 삼색의 두텁떡 세 상자를 샀다. 모든 제자들에게 나눠줄 수는 없는 일이고 세 명씩 네 명씩 직접 얼굴 맞대고 앉아 오랜 시간 가르친 제자들 열댓 명의 것만 준비했다. 다이소에서 마끈과 투명 포장지를 사다가 엄베덤베 쌌다. 투박하면서도 인간적인 맛 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인데 투박하고 후지기만 해서 신경질이 좀 났다. 친구들하고 나눠 먹으라고 서로 다른 색깔의 떡 다섯 개를 싸고 시험 한 주 전이라 소란스러울 것 같은 마음이 다스려질 법한 문구를 써서 넣었다. 내가 합격을 기원해 준다고 합격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살아온 결과 이상의 성과를 거두는 것이 반드시 좋은.. 더보기
종일 가을비가 왔다. 열흘 전만 해도 더워서 창이란 창은 다 열고 있었는데 여름 소나기 같은 비가 몇 시간 내리고 나니 긴바지 추리닝을 입어도 발끝이 시렸다. 빗소리 들으면서 해물파전 부쳐 먹고, 이사하느라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던 난로를 꺼내어 일일이 분해해서 깨끗이 닦고 나니 하루가 다 갔다. 노후 복지 잘 된 나라였다면 그것 참 멋스럽게 게으른 하루였네, 하고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겠지마는. 더보기
식물을 키우자 이사를 가면 꼭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식물을 키우는 일이었다.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이기도 하거니와 나는 가족력 중의 하나가 호흡기 쪽이기도 해서 가을에만 들어서도 목이 쉬 마르고 붓는다. 그래서 물을 넉넉히 대어두고 방 한 구석에 놓을 수 있는 수경식물에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방 정리가 대충 끝나는 것에 맞추어 식물을 좀 주문해 봤다. 먼저 작게 하나만 사 본 것은 행운목. 화분이 도착하지 않아 사이다 페트병의 밑을 잘라 햇빛에 두었다. 햇빛을 너무 오래 쐬어도 잎이 마르지만 너무 안 쐬어도 말라 죽는다 한다. 예뻐서 산 것이지 겨울철 가습의 주력으로 산 것은 아니다. 수경식물을 알아볼 때마다 늘 마음에 두었던 것은 이름도 예쁜 개운죽開運竹. 영어로도 Lucky Bamboo라고 한다. 햇빛을 .. 더보기
별일 없이 산다 1년간 가르쳐온 제자들이 이번 주말 논술 시험을 앞두고 있어 몸이 좀 바쁜 것 말고는, 이사온 동네 어슬렁거리고 중고서점서 새로 사온 책 꽂아넣고 하면서 유유자적 지낸다. 전기 렌지가 들어온 뒤로는 할 줄 아는 요리부터 조금씩 해먹기도 한다. 김치볶음밥도 해먹고 크림 파스타도 해먹고 토마토 스파게티도 해먹는다. 모두, 기름을 두르고 마늘부터 구워 향을 내다가 양파를 넣는 시작 과정이 같다. 냄새를 맡으니 추억이 떠올라서, 더욱 열심히 요리해서 추억과 함께 배터지게 먹어댔다. 추석 때 고향에 갔다가 내 고향의 숨겨진 면모도 발견하고 창문 열어 놓고 영화를 보다가 찬바람 불어 들어오면 넓어진 책상에서 낙서도 슥슥 한다. 별일이 없어서 팔자는 참 좋다. 더보기
새벽 네 시 반 출발을 위해 일어났다. 나중이 될 줄은 알았지만 일 년 후가 될 줄은 몰랐다. 틈새로 난 삼일 연휴를 이용해 인천에서 부산까지 가는 '국토종주 자전거길' 코스 중 마지막 길인 칠곡보 - 낙동강하굿둑으로 떠난다. 동서울터미널 근처로 이사왔다고 좋아했더니만 칠곡보 근처로는 시외버스가 안 간단다. 나는 아침 일곱 시에 떠나는 왜관행 ITX를 타러 잠시 후 서울역으로 출발한다. 평일은 새벽이고 심야고 간에 지하철에 자전거 탑승이 안된다. 출발은 한강 자전거 도로인 셈이다. 계획대로라면 사흘 후, 국토종주 코스의 도장을 다 찍고 이 자리에 다시 앉아있을 것이다. 과정이야 계획대로 될 리 없지마는, 끝만큼은 계획대로 되었으면 한다. 잘 다녀오겠다. 더보기
일식 오찬 새 집 근처의 재래시장을 찾아 반찬을 샀다. 인천에서 보내오는 김치는 떨어진 일이 없지만 그 외의 밑반찬을 사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의 일이다. 식탁을 따로 두지 않고 간단하게 먹는 생활이 십여 년 넘게 이어지다 보니 한 끼에 두세 개 이상의 반찬을 먹는 일이 적었다. 갖춘 식사에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은 식판을 샀기 때문이다. 식판이라면 군 시절과 같은 나쁜 추억도 있지만 구구절절이 쓰기 어려운 좋은 추억도 있다. 조금조금씩 담아놓고 나니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여러 색이 눈에 띄어 보기에 좋았다. 내일은 이번 이사에서 구입한 물건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인 전기 렌지가 들어온다. 조리 시설이 생기면 다시 요리를 시작해볼까 한다. 조금씩 더 깊이 자게 되고, 조금씩 더 허술한 차림으로 동네를 돌아다니게 된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