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쯤부터 시작된 뜨개질은 틈이 나거나 머리가 아플 때에 계속된다. 뜨개질 하면서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은 왕년에 뜨개질 좀 했다 하는 이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스웨터나 후드티와 같이 대단히 어려운 옷까지 짠 이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목도리 뜨기에 다시금 재미를 붙였다는 나에게 선배들이 해 준 이야기는, 취미나 소일거리라면 그 쯤에서 멈추어라, 그 이상은 뜨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였다. 괜한 고생 말고 사서 편하게 쓰라는 말이겠지만.
아끼던 장갑 한 짝을 잃어버린 뒤로 영 마음이 시렸다. 거기에 혹한이 겹치고 자전거 출근이 겹치니 장갑이 없이는 못 견딜 지경이 된 것이다. 손가락 장갑 말고 벙어리 장갑 정도라면 지나치게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라도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겠지 싶어 과감히 도전했다. 첫 작품은 실패가 뻔히 예상되므로 내 손으로 사 놓고도 무슨 생각으로 이걸 산 거지 하고 어처구니 없었던 실 중 하나를 꺼내어 떠 보았다.
어쨌든 완성. 사진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필사적으로 팔을 꺾어 그럴듯해 보이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장갑이라기보다는 오븐 미트에 가까운 작품으로, 장갑 안에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더라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이다. 그래도 첫 번째 시도에서 장갑을 뜰 때에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뜬 두 번째 장갑. 꽈배기 한 줄만 넣었던 첫 번째 장갑과 달리 청담동 홍 선생의 도움을 받아 여러 무늬가 들어간 장갑을 떠 보았다. 만족도는 높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어려워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아울러 모양이 아무리 예쁘더라도 실을 싼 것으로 쓰면 방한에 별 효과가 없다는 것도 잘 알게 됐다.
그리고 일전에 떴던 겨자색 목도리와 세트로 맞추기 위해 떠 본 겨자색 장갑이 세 번째. 두 번째 장갑에 비해 무늬는 수수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는데다 방한 기능도 그럭저럭 만족할 만하였다.
내친 김에 모자도 떠 봤다. 이 모자는 본래 '도로롱 모자'라는 것으로, 마치 방울꽃이나 차임벨 , 혹은 물방울의 모양처럼 동그랗고 오동통하게 올라가는 것이 매력인 모자이다. 하지만 중간에 꼬빡 조는 바람에 뜨는 순서를 헷갈렸더니 위의 사진처럼 중간에 불쑥하고 튀어나온 띠 모양이 생겨버렸다. 그러면서 도로롱모자의 핵심 디자인인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곡선'이 망하고 말았다. 이왕 그렇게 된 거 웃기기라도 해야겠다 싶어 원래의 디자인에서는 토마토 꼭지처럼 뿅하고 조금만 튀어나오는 꼭지 부분을 길게 뽑았다.
결과는 이렇게. 도토리 같다는 사람도 있고 일본식 상투 같다는 사람도 있고 가짜 젖꼭지 같다는 사람도 있고 콘돔 같다는 사람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비록 모욕적이지만, 콘돔 모자가 가장 직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콘돔 모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첫 번째 콘돔 모자는 생각보다 빡빡하게 끼는 사이즈라 - 그러고 보니 더욱 적절한 네이밍이긴 하다 - 두상이 작고 귀여운 친구에게 선물로 갔다.
코를 조금 더 넉넉하게 잡고 새로 뜬 모자. 정신 차리고 원래의 '도로롱 모자'를 뜰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오기가 생겨서, 나는 원래 이런 모자를 전문으로 뜨는 사람이라는 듯이 콘돔 모자를 하나 떠 뜨고 말았다. 작은 콘돔 모자는 실 한 타래로 가능했지만 큰 콘돔 모자는 한 타래가 넘어갈 것 같아서 어차피 그렇게 된 바 각기 다른 두 색을 써서 떠 봤다. 두 번이나 뜨고 나니 애착이 생기는 것인지 솥뚜껑 같기도 하고 스머프 모자 같기도 해서 재미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뒤 일이 없으면 가만히 집에서 요양만 하고 있는 요즘. 지난주 주말에는 두 가지 색을 써서 목도리를 떴다. 이 목도리 또한 주고 싶은 사람에게 잘 갔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은 주로 목에 남았다. 오래 실을 뜨고 있으면 목이 한층 더 뻣뻣하고 뻐근해지는 것 같아, 한동안은 좀 쉬려고 한다. 그래도 몸이 온전히 낫고 나면 이따금은 시간을 내어 취미로 자리잡힐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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