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는 크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과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형식이 있다. 충실한 내용이 있어도 형식이 소략하면 거친 말이 되고 형식은 화려하되 내용이 공허하면 간교한 말이 된다. 내용과 형식이 모두 갖추어진 말은 그 외의 장식 없이도 충분한 영향력을 갖는다. 비유하면 한 끼로 든든한 백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그 위에 유효한 맥락이나 비유, 유머 등의 장치를 활용하는 전략까지 더해진 말은 상찬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다.
듣고 접한 정치인 가운데 말이란 무엇인가 뿐 아니라 말에서의 유머란 전략은 무엇인가를 가장 잘 꿰뚫어 보고 나아가 훌륭한 활용까지 실천해 낸 인물인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금일인 2018년 7월 23일 서울 중구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경찰은 자필로 작성된 유서가 발견되었고 주변의 정황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부검이 필요 없는 자살임을 공식 발표하였다. 자연인 노회찬의 삶은 여기에서 끝났다.
소속 정당이 긴 침체 끝에 재도약의 맏물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본인 또한 십 년을 한결같이 미디어를 통해 국민들과 잘 소통해 왔던 이 때에 그가 슬픈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는 세칭 '드루킹'이라 불리는 정치 브로커로부터 5000여만 원의 정치자금을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고인은 관련된 의혹이 제기되던 시점부터 관련 사실을 일체 부인하여 왔으나 사망일인 오늘 발견된 자필 유서에서 수수 사실을 인정했다. 아울러 금전은 받았으나 청탁은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으나 그를 반대하고 혐오했던 진영까지도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을 상상하여 그에 맞춰 생각해 보면 힘이 있는 말이기는 어렵다. 그 자체로 이미 부정한 일이고 또 드루킹 특검의 수사 결과에 따라 추가되는 사실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변호는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요새 주로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내는데, 올해에는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 태어난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이들 가운데 정치에 조금이나 관심이 있다 하는 축에도 멀지 않은 과거에 긴 시간 동안 대통령을 제치고 첫 손에 꼽혔던 주요 인물인 이회창을 아는 이는 전혀 없다. 대부분은 김영삼과 김대중도 누가 누군지 구분하지 못하는 바로 그것이, '역사'임을 거듭 느끼며 산다. 잊혀지는 사실들에 대한 개개인의 회상과 관련 없이 역사는 남길 만한 것만을 남기고 제 길을 간다.
그러니 정치인 노회찬의 삶도 앞으로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한 세대는 고사하고 당장 2년 후인 2020년 21대 총선에서 첫 투표권을 손에 쥔 이 중에 노회찬을 알거나 혹은 기억하는 이는 몇이나 될 것인가. 개중 그의 정신을 추모하여 투표 행위에 반영하는 이는 또 몇이나 되겠는가. 어쩔 수는 없다. 다만 나는 그것이 슬퍼, 홀로 일찍 피어 더 피지 못했으나 나름으로 아름답게 만개했던 그를 기억하고자, 오랜만에 일기장을 열어 부고를 전한다.
마지막에 덧붙이는 사진은 다음에 소개하는 영상에서 내가 갈무리한 것이다. 손석희 현 JTBC 보도부문 사장이 MBC에서 <100분 토론>을 진행하던 2009년의 일이다.
당시 손석희 앵커는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100분 토론>의 진행에서 하차하게 되었는데, 인기리에 진행 중이었는데도 하차에 명확한 이유가 없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아무튼 <100분 토론> 팀은 당시까지 10년의 프로그램 연혁 가운데 8년여를 함께 해 온 손 앵커의 하차를 맞아, 고인을 포함해 유시민, 송영길, 나경원 등 그간 인기 있었던 패널들을 모아 <100분 토론>이라는 프로그램과 TV 토론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토론을 기획하였다. 그리고 프로그램 말미에 김주하 앵커, 김혜수 배우, 신영복 교수 등 각계의 저명 인사들에게 받아온 '손석희 인물평'을 방송했는데, 따뜻한 덕담이 오고간 뒤에 마지막으로 출연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손 교수님과 저는 나이가 비슷한데 늘 젊어 보이시는 비결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100분 토론> 제작진은 이어 화면에 박 시장과 손 앵커의 사진을 맞붙인 뒤 손 앵커 사진 뒤에 후광 CG를 넣고 재미난 음악도 삽입하는 드문 시도를 했다. 스튜디오로 넘어온 화면에 등장한 손석희 앵커는 난처한 웃음으로 고개를 숙이며 안경을 추스렸다가 이내 다시 카메라를 응시하며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여기 노회찬 대표도 저랑 동갑이십니다'라고 말했다. 토론을 지켜보던 장내에는 웃음이 터졌고, 노회찬 의원은 방청객들을 바라보며 활짝 웃다가 이내 V자를 그렸다. 그와 같은 삶의 이력을 가졌던 이 가운데 이처럼 천진함을 잘 보존한 이가 몇이나 되었을까. 그 뒤의 삶 또한 녹록치 않았으나 꺾이지 않는 상찬을 지치지 않고 우리 앞에 차려놓았던 비결은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싶어. 가장 기억하고 싶은 모습을 덧붙여 둔다. 흠향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