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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3

슬픈 인연

 

 

 

 

 

 

학교 옆에 살고 있고 고향은 인천이라 내 소유의 탈 것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가, 몇 년 전 갑작스런 사춘

 

기처럼 오토바이에 흥미가 생겼던 때가 있었다. 자태를 뽐내는 사진들을 누비다가 마침내 만난 첫사랑은 일본에

 

서 온 벤리라 했다. 편리(便利)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라는데 일본말 같기도 하고 이탈리아 말 같기도 한 묘한

 

어감까지 마음에 들었다.

 

 

 

벤리는 팔색조였다. 제일 흔한 흰 색 말고도

 

 

 

 

 

 

 

 

 

이런 색이나

 

 

 

 

 

 

 

 

 

이런 색을 입을줄도 알았다. 모두 잘 어울렸지만, 내 마음을 전량 인출해 간 것은

 

 

 

 

 

 

 

 

 

빨간 드레스. 예쁜 것만 해도 귀한데 출시량도 많지 않아 몸이 달아 못 살 지경이었다.

 

 

 

 

 

 

 

 

 

그냥 길가에 세워 놓아도 이런 자태. 다른 사람들은 그냥 예뻐 보여서 예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더

 

욱 예뻐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볼 때마다 이게 생각이 났기 때문. 하지만 진중권 형처럼 성공하지 못하면 소형 비행기 운전은 꿈에도 못 꿀 일

 

이다. 막상 진중권 형도 필리핀 가서 타는 거 보니까 이렇게 예쁜 비행기는 있지도 않더구먼. 어차피 현실에서

 

못 탈 바에야, 빨간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붉은 돼지>의 마르코에게 가 닿는 가장 가까운 위치가 아닐까 싶었

 

다.

 

 

 

하지만 막상 오토바이를 사자니 돈 문제도 있고, 또 마침 125cc이하의 오토바이도 면허증을 따로 따야 하느니

 

마느니 하는 시끄러운 소리도 있고 해서 그러덩 저러덩 하는 새 시간은 지났고 마음도 식었다. 첫사랑은 그런 것

 

이다.

 

 

 

그렇게 살다 옛 사랑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작년 말의 일. 벤리의 새 모델이 나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매 해

 

꾸준히 나오던 시리즈가 아니라서, 살 거라면 이미 중고가 되어버린 몇 년 전의 제품들을 웃돈 주고 사야 했었는

 

데, 새 모델이라니! 게다가 50cc와 90cc이던 종전의 배기량이 110cc로 커졌고, 구동 방식도 따로 조작을 해야

 

하는 매뉴얼 방식에서 땡기면 나가는 스쿠터 방식으로 바뀌었다 했다.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가, 우연히 길을 걷

 

다 오래 전 헤어진 내 여자친구를 보았는데 엄청 예뻐졌더라는 말을 들을 때처럼, 재회(再會)를 앞두고 나는 떨

 

렸다. 벤리 110. 벤리 50이나 90일 때도 그렇게 아름다웠던 네가 이제는 벤리 110. 내 심박수도 110. 분당 말고

 

초당.

 

 

 

 

 

 

 

 

 

 

 

 

 

 

 

그리고 만난 벤리 110. 내가 수류탄 두르고 돌진하고 싶었던 것은 대체로 한국의 공기관과 기업 등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설마 외국 기업 1호가 혼다 네가 될 줄이야. (산 적도 탄 적도 없긴 하지만) 내 벤리에 무슨 짓을.

 

 

 

 

 

 

 

 

 

그리고 첫사랑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보험 가입서를 꺼내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던 두 장 째의 사진. 도무

 

지 알아볼 수 없게 변한 것만 해도 충격과 절망이 들었었는데, 심지어 차종이 변했다니. 경비행기처럼 날렵하게

 

이탈리아 외곽을 달릴 것 같던 옛 모습은 간 데 없고, 벤리 110은 앞에는 바구니, 뒤에는 거치대를 달고 도쿄나

 

서울 한복판을 횡단하는 배달용이 되었다. 농담이 아니다. 혼다 측의 설명에 따르면 벤리 110은 '비즈니스'용으

 

로 개발되었다.

 

 

 

 

 

 

 

 

너무도, 정말 너무도 변해버린 모습에 화가 난 것은 나 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벤리를 사랑했던 이들 중에서는

 

한 포켓몬스터의 모양을 보고 디자인한 모양이라는 인신공격적 발언도 나왔다.

 

 

 

 

 

 

 

 

 

이렇게도 꾸밀 수 있다 하고

 

 

 

 

 

 

 

 

 

(진짜 돈 많이 들이면) 이렇게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넌 오리너구리. 그것도 배달 중인 오리너구리.

 

 

 

차라리 잘 됐지 뭐. 오토바이 타면 혼구녕을 낼 사람도 주위에 득시글득시글하고, 버스나 지하철 타면 편하게 책

 

도 읽을 수 있고, 서울 시내라면 오토바이로 가도 별로 빠르지도 않다 하고, 이러이렇고, 저러저렇고.

 

 

 

따위의 생각을 하며 애써 잊고 살다가.

 

 

 

 

 

 

 

 

 

연희동 뒷골목을 걷다 딱 만났다.

 

 

 

자연스레 웃으면서 '오랜만이야'라고 말하고,

 

길가의 카페로 들어가 차를 마시다가

 

우리 다시 잘 해 볼 수 있을까, 라는 그녀의 말에

 

따스한 표정으로

 

우린 이제 안 될 것 같아. 좋은 사이로 남자

 

 

 

라고 했으면 좋으련만.

 

 

 

 

 

 

 

 

나는 얼굴을 가리고 으아앙! 하고 울면서 도망을 쳤다. 날 보지마, 날 보지마 하고 외치면서 뛰다가 돌아보니 벤

 

리 110은 하나밖에 없는 슬픈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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