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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1

송도유원지

 

 



지난 7월, 서울 강남역에서 인천 연수동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처음 타 봤다. 버스는 원래 있던 노선을 따라 인천을 구

비구비 돌았을 뿐이지만, 졸업한 고등학교를 지나고 당구를 치러 드나들던 인하대를 지나고 면허 실기시험을 보던 옥

련동을 지나는 그 길이 내게는 마치 추억 투어 기획상품과도 같았다. 차창에 달라붙어 정신없이 구경하는데, 버스는

목적지인 연수동에 닿기 전 마지막으로 크게 돌아 송도유원지를 끼고 달렸다.


부동산 광풍이 불기 전 인천 사람들이 '송도'라고 말하면 대개 송도유원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윗 세대부터 우리 세

대까지 송도는 꾸준히 중고등학교 시절의 소풍지였고 사랑을 고백하는 데이트 장소였고 아이가 걷게 되면 처음으로
 
데리고 가는 가족 야유회지였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언젠가 일기장에 올렸던 어린 시절 파마머리 사진의 배경도, 고

등학교 2학년 때의 여자친구를 처음 만났던 것도 송도였다.



스무 살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가 본 일이 없으니 적게 잡아도 십 년 만이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도 입

구의 볼록거울과 작은 호수처럼 생긴 해수욕장이 그대로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요 무더위만 지나면 손잡고 나다닐

사람을 데리고 마실을 와야겠다, 마음먹었는데, 한 달이나 지났을까, 팔월의 어느 날에 송도유원지의 폐장 뉴스를 보

게 되었다. 아나운서는 노후된 시설과 미진한 홍보 탓에 적자를 견디지 못했다는 이유를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전했다. 나는 우뚝 서서 TV를 노려보면서, 박민규의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주인공이 어

느날 삼미슈퍼스타즈가 해단식을 갖게 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정도의 생각밖에 할 수 없

었다. '리뉴얼'하고 '리모델링'해서 언젠가는 재개장될 것이라는 멘트가 이어졌지만, 큰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건

SK 와이번스가 삼미슈퍼스타즈를 대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시설물을 철거하고 해수욕장을 메우기 전에 멀리서라도 한 번 더 보고 싶다, 고 생각했는데, 다시 거짓말처럼연이
 
닿았다. 오늘이었던 큰아버지의 회갑연이 송도에서 열린 것이다. 집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어젯밤 인천으로 내려가

는 버스에 몸을 실을 때까지, 나는 송도에서 잔치를 하는지 몰랐다.


자리가 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로 일가가 서른 명 이상 모인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작년과 재작년에 우수

수 결혼을 한 친척 형 누나들이 갓난쟁이들을 안고 와, 사람들의 이목이 그리 쏠린 틈을 타 나는 카메라를 들고 자리에

서 나왔다. 근래 아버지와 주로 십칠 도 짜리를 마시다가 이제는 다들 할아버지가 된 고모부들과 오랜만에 이십 도 짜

리를 마셨더니 소금기가 섞인 가을 바람에도 얼근하니 휘적휘적 걷기가 좋았다.


유원지는 이미 폐장되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따로 분리되어 있는 운동장에서는 꼬마애들이 공을 차고 놀고 있었지만

유원지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워낙 많아, 조금 더 가까이 간다고 해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색의
 
도료가 여기저기 벗겨진 놀이기구들, 원숭이나 공작새 등의 흔해빠진 동물들만 그득그득한 동물원은 다시 볼 수 없는

것이었고, 그나마 높이 솟아 있는 대관람차만 멀찌감치서 몇 장의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 찍는 동안 해가 차차 져,
 
그렇지 않아도 레이몬드 챈들러의 LA같았던 풍경은 한층 더 쓸쓸해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와 본 것만 해도 복이다, 하

고 중얼거리고는 돌아섰다. 찍은 사진을 덧붙여 마음 속의 송도유원지에 작별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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