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 안철수의 출마 소식이 전해졌다. 정치경력이 전무하다는 점, 그가 박경철 원장과 진
행하고 있는 '청춘콘서트'의 기획자 중 한 명이 군사정권에 복무했으며 이회창 정권을 창출하려는 데에 일익을
담당했던 이라는 점 등이 인구에 회자되었지만 본인이 의사를 표명하기도 전 그의 지지율은 50%를 상회했다.
그 이전까지 한명숙에 대항하여 집요하게 나경원과의 양강 구도를 형성해 나가던 보수 언론지들은 논조를 잃고
허둥거렸다. 안철수 본인은 예의 수줍은 웃음을 지으면서도 자신에 대한 비난과 지적에 대해 '대한민국 최고의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하고 운영한 경력'을 들어 반박하고 아울러 정치인이 아닌 자신에게 쏟아지는 인기의
크기와 내용에 대해 정치권이 오히려 반성해야 한다는 일갈까지 내었다.
그런데 안철수가 심사숙고하고 있던 며칠 사이, 오랫동안 시민운동의 주축으로 활약해 온 박원순 씨의 출마소
식이 함께 전해졌다. 대중적 인지도는 낮지만 진보 진영에서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박원순이 안철수와
함께 출마한다면 진보-개혁의 표는 나뉠 가능성이 컸다. 박원순과 안철수는 후보 단일화를 위한 비공개 만남을
갖기로 했다. 제삼자의 자격으로 대담에 참가한 박경철 원장의 술회에 따르면, 박원순이 20여분 간 자신의 포부
와 의지를 설명했고, 이야기를 듣고 난 안철수는 '제가 불출마하겠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지식인인 박경철 원장의 말이라지만 너무 영웅담 같아 거부감이 드는 한편으로, 정치와
관련하여서는 정말 오랜만에 듣는 '멋진' 이야기라 감성이 자극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두 사람은 기자회
견을 갖고 합의한 사실에 대해 공표했는데, 이 자리에서 밑창이 너덜너덜하게 닳은 박원순의 구두가 사진작가
조세현에 의해 촬영되어 또 한차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재인의 중재에 의해, 박원순은 야권 통합 후보 경선에 참가하기로 합의했다. 야권 통합 후보는 한나라당을 제
한 야당에서 각 당마다 당 내 경선을 통해 후보를 뽑고 그 후보 간에 또다시 경선을 실시해 뽑게 된다. 제 1야당
인 민주당에서는 벌써 백가쟁명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역시 박원순과 한명숙 간의 대결이 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한나라당은 곽노현의 단일화와 같은 야권의 단일화 쇼였음이 증명되었다는 논
평을 내놓았다.
안철수가 50%를 넘는 지지율을 얻었던 설문조사에서, 박원순의 지지율은 5%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시민 사
회에 끼쳐온 영향과 그 결과를 알고 있는 이라면 누구도 5%라는 숫자에 만족하거나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그
는 촛불집회, 용산사태, 반값등록금과 같은 민생문제에서 선두에서 활약한 '참여연대'의 창립멤버이며 '아름다
운가게'로 유명한 '아름다운재단'의 상임이사이고 정책연구소인 '희망제작소'의 소장이다. 사회개혁의 의지와
열정, 그리고 성과를 끊임없이 증명해 왔으며 저술과 토론 프로그램 출연 등을 통해 대중과도 활발히 소통해 왔
다. 분명히, 그는 시장이 되고 싶어서 시장 선거에 나가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다. 그의 선전을 기원한다.
그런데 박원순의 행보와 관련없이, 안풍은 그칠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제 박근혜, 문재인과 함께 거론
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단일화 직후인 지난 7일에는 지난 대선 이후 단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았던 박근혜를
누르고 대통령 후보 지지율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보수언론들은 '한국의 대선에서 대세
주자는 언젠가 한 번 역풍을 맞기 마련', '검증되지 않은 거품'등의 표현을 써가며 진화에 나섰지만 열기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진보-개혁 진영에서 올 해 발굴하고자 했던 대선급 주자인 조국, 문재인과 비교를 해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해진
다.
'강남좌파'라는 트렌드를 유행시키며 등장한 조국 교수의 최대 약점은 '학자-엘리트' 캐릭터와 '정치 근육'이었
다. 엘리트 이미지와 명문대 교수의 신분은 서민층을 끌어안는데 치명적인 단점이 될 가능성이 높으며, 무엇보
다 실제 행정, 정치 경력과 세력의 절대적인 부족은 1년 남짓의 선거 운동으로 보충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 보였다기보다는 새로운 얼굴을 찾고자 하는 진보-개혁 진영
의 소수의 트렌드 리더와 지식인에 의해 기획된 캐릭터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에 비해 안철수는 인기 TV 프
로그램인 '무릎팍 도사'에 섭외된 사실과 호평 일색이었던 반응이 보여주듯 높은 지명도와 대중적인 인기를 가
지고 있으며, 전공이 아닌 분야에 뛰어들어 한국에서 손꼽히는 기업을 만들었던 경력이 있다. 아울러 현재도 소
외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20대의 젊은이들과 '청춘 콘서트'를 통해 지속적으로 만남으로써 사회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한편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또한 확보하고 있다.
문재인의 최대 단점으로 꼽히는 것은 결단력과 행동력이다. 한편에서는 대선 레이스에서 너무 일찍 나서는 것
은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하지만, 그가 몇 차례에 걸쳐 적기를 놓쳐왔던 것은 분명한 사
실이다. 현재도 대선 주자로서의 중량감을 주기보다는 원로나 킹 메이커로서의 역할에 안주하고 있는 듯한 인
상을 준다. 필요한 때가 되면 분명히 행동하겠지만, 아직까지는 노무현을 회상하고 추모하는 정서 이상으로 호
소하는 지점이 없다. 그에 비해 안철수는 실제 지자체장 선거의 단일화에 참가했으며 (며칠 간의 경험을 대단하
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비난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단일화가 순식간에 끝난 것은 안철수 본인의 역할 때문이었
음을 기억하자. 아울러 그러한 단일화가 유권자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도 분명히 지적해야 할 것이다.), 당
선이 분명한 가시권에 있었음에도 불과하고 자신의 지지율의 1/10에 불과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결단력
을 보였다. 시장은 시장이 되고 싶은 사람이 맡는 자리가 아니라 시장이 되어야 할 사람이 맡는 자리라는, 정치
권에서는 사장된지 오래인 근본적 가치를 복원시킨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본인이 생각할 때 대
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될 것 같다면 자신도 얼마든지 출마할 수 있다는 무의식적인 의지의 표현으로도
읽힌다. 아울러 '안철수 어록'이라는 형태로 돌아다니는 발언들을 보면, 정치적인 소신이나 본인의 가치관을 분
명하게 밝히면서도 비유와 사례를 통해 쉽게 전달을 하고 있고, 정치 원론이나 철학 이론과 같은 명구를 통해
감성적인 호소력까지 성취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정치인의 발화법, 그것도 거물이 될 가능성이 높
은 정치인의 발화법이다.
5. 마무리하는 잡감을 적으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양자 간 단일화 후보는 박원순으로 되었고 안철수는 잠재적
대권주자로 올라섰다. 그에게 줄을 대려는 목소리, 그를 깎아내리는 목소리, 그를 염려하는 목소리 등이 이어지
지만 그건 더욱 본격적인 레이스가 시작된 뒤 다시 한 번 정리하기로 하자. 내 목소리를 잠깐만 덧붙이자면, 노
무현이 혼자 싸우다 죽은 이후로는 영웅이 탄생할 때마다 저러다 또 한 명 보내는 거 아닌가 걱정하는 마음만
가득했는데 이번엔 기대되는 마음이 조금 더 크다. '진짜 되면 어쩌지. 그런데 되면 좋겠다', 하고.
- 조국 교수가 트위터로 이번 사태를 관찰하는 관찰기는 여러 언론을 통해 날라졌다. 본인이 만족하신다면, 그
역할에서 대가가 되시는 것도 좋을 듯.
- 이회창 총재께서 '안철수,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촌평하셨는데, 각종 언론에서 전부 단신 처리됐다. 안철
수 지지율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병 걸리셨어요?'라고 했던 박근혜의 답보다 훨씬 셌는데. 말년이 초라하셔
서 안쓰럽다.
- 와중에 불사조 이인제가 이회창의 자유선진당과 심대평의 국민중심연합이 합당한 충청지역당 '자유선진당'에
입당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회창과 심대평이 다시 연합하는 소식도 소식이지만 이회창과 이인제가 한솥밥
을 먹는다는 사실이 이렇게 조용히 지나간다니. 충청의 힘은 이회창과 이인제도 하나로 묶는다. 대단하다. 하나
만 부탁하자. 이번 대선의 야권 단일화에 자유선진당은 제발 논평 내지 말아달라. 양심이 있다면.
- 안풍의 직격탄을 맞은 이들 가운데 하나로 민주당을 제외한 야 4당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보신
당과 민주노동당의 합당이 끝내 결렬되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던 이들도 계속되는 내홍에 다소간 진력을 느
낄 즈음, 모든 정치용어들을 구태의연하게 보이게 만드는 안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합당과 단일화, 그리
고 민주당과의 투쟁 등 고난을 앞두고 있는 그들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고 그 진정성 또한 의심하진 않지만,
'정치'라는 말 자체가 싫어진 대중들에게는 그들 또한 분명히 하나의 '정치세력'이기 때문에 안철수보다는 한나
라당에 더 가까운 세력으로 여겨질 공산이 크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업보다. 감내하고 승리하시기 바란다.
- 마지막. 말해봐야 바뀔 건 별로 없겠지만, 민주당, 미워하는 사람들 많은 거 좀 알아주길 바란다. 대안세력이
없는 판에 제일 세가 세니까 방파제 역할로 막아놓는 것 뿐이지, 주장 확실하고 인물 참신한 제 3당 나오면 수십
년 역사 날아가는 건 하루아침일 거다. 개인적으로는 민주당이 정신차리는 것보다 제3당 나오길 더 간절히 바라
고 있다는 것도 꼭 알아줬으면 한다. 선거 때마다 당신들에게 표 던졌던 유권자가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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