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처럼 공돈이 생긴다면야 선릉 역까지 뛰어가 기타 바를 살 기세이지만, 일단은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봐야 하기도
하고 공부하기가 싫기도 하고 해서 다른 기타를 찾아보았다. 물론 보급형 통기타가 구입과 관리에 있어 가장 편하나
방에서 연습하기엔 소리가 다소 크지 않을까 걱정되고, 악기를 사고 연습하는 자체가 당장의 소일거리보다는 언젠가
떠날 긴 배낭여행의 동반자를 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여행용 기타가 적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모자란 실력
을 포장하기엔 신기한 악기 모양으로 일단 듣는 이를 홀려두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는 꾀돌이 속셈도 있었다.
넘버 원 컨텐더인 마틴의 백패커. 기타 바는 안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이 기타는 수 년 전에 실물을 보고 이미 마음을
준 바 있었다. 신품으로 구입하면 40만원 가량.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중고 매물도 이따금 찾을 수 있으며 이전에 아
는 사람으로부터 외국에 다녀오는 사람에게 직접 부탁하면 대략 250 - 300불 사이에 구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들은 기억
이 있었다. 혹 중고 매물이 있다면 바로 구매할 의사까지 갖고 검색을 시작한 것인데, 얼마 전 방영된 무한도전에서 이
적 씨가 들고 나왔다는 이유로 그간 수퍼스타가 되어 버린 것을 알고는 김이 식었다. 순풍산부인과의 송혜교를 흠모하
는 것이지 가을동화의 송혜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베이비복스의 막내인 윤은혜를 아끼는 것이지 커피프린스의 윤
은혜에 환호하는 것이 아닌, B형으로서는 그야말로 등돌리기 딱 좋은 이유. '그것밖에 못 쳐요?'는 참을 수 있지만 '이
적이 치던 기타네요?'는 참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이 붐이 지나가고 날 때까지 기타를 안 사고 있다면 아마도 다시금 기
타 바와 함께 마음 속에서 자웅을 겨루겠지만, 지금은 바람 피는 애인 보는 듯한 심정이라 쳐다보기 싫여.
그렇다면 거의 유일하게 남는 선택지인 세고비아 TF-10. 낙원상가에서 잡아보았을 때에는 느낌이 우쿨렐레와 크게 다
르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기타는 십만 원 중후반대, 이것저것 다 합쳐도 이십만 원 중반대를 넘어가지 않는데 비해 커
스텀 기타들과 비교해 봐도 뒤지지 않을 유려한 디자인이 발군. 허나 성능에 관해 기타 커뮤니티의 평은 그리 좋지 않
았다. 대체로 보자면,
- 무엇보다 예쁘고, 여행지 놀러가서 재미삼아 치기에는 그럭저럭 돈 값을 한다.
- 그러나 몸통이 작고 좁은만큼 소리가 굵고 깊지 못하여 메인 기타로서는 함량 미달이다.
- 아울러 폭이 좁아 운지를 하기 어렵다.
는 평이 주를 이룬다. 소리가 작다는 것은 일반 주택에서 연습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오히려 반길 일이지만 정상적인
운지를 하기가 어려워 다른 기타를 연주할 때 불편함이 있다는 것은 좀 꺼려지는 정보였다. 딱 떨어지는 선택이 없구
먼.
내일은 홍대에서 저녁 약속이 있다. 호우가 내리지 않는다면 약속시간보다 일찍 가서 기타 매장을 몇 군데 둘러보려고
한다. 이십만원 대 백패커 중고가 있거나, TF-10의 사장님이 미쳤어요 대할인 행사를 만나거나, 혹은 있는지도 몰랐던
후손 없는 거부 삼촌과 우연히 조우하게 되는 등의 벼락같은 행운 있길 빌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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