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밀양, 혹은 부산 앞바다의 가덕도에 제 2 허브공항을 건설하겠다던 동남권 신공항 사업이 결국 백지로 돌아갔다.
정부는 대안으로 제시되던 김해공항의 확장도 조사 결과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국제선을 늘리거나 대구와
인천, 부산과 인천 간 KTX를 신설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는데, 벌려 놓았던 일에 비해서는 허탈해지기까지 하는 대책
이다. 이 정도 방안으로 해결 가능한 일에 정부가 애초 배치했던 예산은 20조이다. 사실 애당초 수요나 경제성 때문에
착수된 사업이 아니라 현 대통령의 대선 당시 공약이라는 이유로 추진되던 사안이었기 때문에 일만 놓고 보자면 되어
야 할 결과가 된 것 뿐이지만 그 후폭풍이 작지 않다. 원인과 현상을 생각나는대로 나누어 적어두고자 한다.
하나. 가장 먼저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해당 지역의 지역 사회들이다. 동남권 신공항은 본래 경북 내륙 지역에
건설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업 타당성 조사 등을 이유로 세 차례에 걸쳐 결과 발표가 미루어지는 동안 부산 앞
바다의 가덕도가 대항마로 떠올랐다. 밀양 지역은 국토의 중앙에 있다는 점, 인천공항의 위기시에 대비한 내륙공항이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을 강점으로 내세웠고, 가덕도 지역은 바다를 메우기만 하면 되므로 항로나 소음의 문제에 있어
편리하다는 점, 신공항은 제 2허브공항이 아니라 김해공항의 특성을 잇는 공항이라는 점 등을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
서로의 장점만 비교해서 택일하면 될 일이었지만 지역 사회는 점차 서로의 단점을 공격적으로 지적하는 정도를 넘어
감정적인 비난을 일삼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결과가 발표된 지금, 선정과정에서는 경쟁자인 탓에 당장의 토론, 혹
은 투쟁에 열을 올렸던 지역사회들은 이제 갈등의 소지가 있었음에도 확실한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던 정부의 태도에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엄용수 밀양 시장은 '(정부에게) 철저하게 우롱당했다'며 시장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고도 한
다. 재보선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대선과 총선이 고작 1년여 남짓 남은 시점에서, 이러한 경상도 민심의 향방은 정권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것 같다.
둘. 선정 과정에서 흥미로운 구도가 나타났다. 범 밀양 지역 대 부산 간에 이루어져 있던 갈등 구조가, '서울에 본사를
둔' (이 사실은 지역 언론에 의해 지적된 것이다.) 언론사들이 동남권 신공항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보이자 서울 대
지역이라는 새로운 연합 구도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동남권 신공항 사업이 경제적 타당성에 있어 누락점이 많은데도
억지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언론과 방송 등의 여러 루트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진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이 사안은 사실 전 국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밀양 대 부산의 밥그릇 싸움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서울 대 지역의 구도가 짜여지면서 단순한 지역이기주의를 넘어 거점식 개발과 균형 개
발 간의 투쟁처럼 비치게 된 것이다. 자기들만 낸 세금도 아니면서 부산에 달라, 경남에 달라 싸우는 꼴이 영 탐탁치
않았던 나로서도 '지역 경제를 위해서'나 '서울만 몰아주는 것은 이제 그만'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는 일정한 타당성과
진실성이 있다고 여겨졌다. 균형 개발의 수혜자가 부산과 경남이어야 할지에는 여전히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지만.
셋. 이만한 사안에 정치인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다. 레임덕이 본격적으로 가속화되면서 점차 강성의 목소리를 내오던
한나라당 내 친박 계열 의원들은 이번 일을 기점으로 대통령이 탈당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하게 되었다. 그 수장인 박
근혜 의원은 '지금 당장은 경제성이 없다 하더라도 필요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제 입장에서도 계속 추진할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치적 근거지인 대구가 밀양의 배후지역으로 이른바 '피해지역'에 포함되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간 입을 열어야 하는 데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해 온 박 씨이며, '제 입장에서도 계속 추진하'겠다는
발언의 뉘앙스 등을 참고해 볼 때 본격적인 대권 레이스를 시작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이 가능하다.
4대강 사업으로 국채 남발, 구제역 대응 미숙, 고위 공직자들의 잇달은 청문회 낙마, UAE 원전 수주 상의 의혹점 등 거
주 지역을 불문하고 국민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을 거듭해 온 현 정권. 한나라당의 표밭인 경상도에서도
민심의 이반은 명약관화한 것이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친박계에서 친이계와 분리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 또한 정해진 수순이었으나 그 강도가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적대적 관계라고는 하나
같은 당 내의 세력이었던 친박계에서도 이만한 선긋기와 차별화로 시작을 하였으니, 누가 다음 대권을 잡더라도 이명
박 정부에 대한 국감과 특검은 피해갈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와중에 민주당에서는 '국민과의 약속이므로 지켜져야 한다'는 발언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신공항 사업이 혈세의 낭비
인 것은 정부의 자인을 통해서 더욱 널리 알려졌고, '국민과의 신뢰'라는 타이틀은 박근혜 씨가 일찌감치 따 가지고 갔
다. 4대강 정책의 이행에 대해서는 함구하였고 충청권 문제에 대해서는 '공약은 이행되어야 한다'는 일관적 입장을 보
여온 박근혜 씨에게는 최소한 '한 말은 지킨다'는 강력한 '명분'이 있고, '이명박의 한나라당과 박근혜의 한나라당은
다르다'는 취지의 발언을 통해 최대 표밭인 경상도를 규합시키는 실리 또한 거두었다. 이런 와중에 최문순 의원 등의
각개 전투만이 있었을 뿐 현 정권 내내 유의미한 결과 없이 한나라당의 비토 세력으로서만 그 이미지를 점해온 면이
적지 않은 민주당이 같은 전략전술을 택한 것은 명분과 실리, 양면에 있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당장 있을 재보선에
서 일단 이긴 뒤에 생각해 보자는 것일까. 2000년대의 민주당을 보면서, 예전의 나는 단순히 프레임을 잘 못 짤 뿐이지
진정성은 있다고 여겼는데, 요새 와서는 '민주당이 가장 바라는 것은 전라도 내의 한나라당'이라는 말에 크게 수긍할
때가 적지 않다.
넷.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또다른 대선 공약이었던 과학비즈니스벨트. 충청권에 지어 주겠다
던 3조 5천억짜리 떡고물이다. 올해 초 좌담회에서 이 대통령이 재검토를 시사하면서 시작된 충청권의 불안은 이번 동
남권 신공항의 백지화로 더욱 커질 전망이다. 경상도 민심을 달래기 위해 과학비즈니스벨트를 일부 대구로 이전한다
는 소문까지 돌고 있는 실정. 누가 봐도 돌려막기인데, 만약 괴소문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그 근거를 뭘로 댈지 벌써 궁
금하다.
다섯. 이 대통령은 내일 국민담화를 통해 이번 사태에 대해 해명하기로 했다. UAE 원전수주나 금미호 사건 등 시쳇말
로 '면이 사는' 일에는 본인이 나서고, 세종시나 이번 동남권 신공항처럼 '면이 죽는' 일에는 총리를 앞세우는 것이 이
대통령의 못된 버릇이라는 지적이 기억난다. 박근혜 의원의 발언이 없었더라도 국민담화를 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것은 본인이 아니고는 진화가 어려운 정도의 일이라고 여긴 것일까. 아무튼 나
는 생방송을 통해 전해지는 육성이 썩 듣고 싶지 않아 나중에 정리된 기사로 내용을 접할 생각이다. 일각에는 만우절
을 택일해 국민담화를 하는 것도 각하의 노림수라는 불충한 논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