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다음 영화에 출연한다는 콜린 퍼스의 <King's Speech>를 보았다. 여러 작품에 출연한 세계적인 배우이
지만, 내 또래의 남성들이라면 2000년대 초반의 영화인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마크 역할로 기억하시는 이가 많을 것
같다. 그 맘때쯤 남자들끼리 모여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저 사람 반의 반만이라도 닮으라고 여자친구에게 구박
을 받은 이야기가 큰 호응을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 미웠던 콜린 퍼스도 이제는 팔자 주름에 옆머리가 희끗희
끗. 가슴 한 구석에서 용서의 마음이 뭉클 솟아오른다. 마음 편하게 좋아하도록 이적 형이나 성시경도 빨리 늙어줬으
면 한다.
콜린 퍼스는 이 영화에서, 개인적인 행복을 찾아 왕위를 버린 형의 뒤를 이어 히틀러가 전쟁을 선포한 시기에 나라를
이끌어 가야하게 된 조지 6세 역할을 맡았다. 영국의 근현대사에 관한 지식이 전무해서 영화가 얼마나 사실에 기초했
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스토리에 따르면 조지 6세는 비록 제1 왕위 계승자는 아니지만 왕자로서의 처신에 대해 크
게 주의를 받으며 자란 탓에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인간 조지 6세가 한 언어치료사를 만나 내면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지, 그 과정의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의 대단원은 그 후로 전쟁이 어떻게 진전되었다든지, 조지 6세가 어떤 업적을 남겼다든지 하는 역사적 기
록이 아니라 그가 히틀러의 침공에 대한 대국민 연설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주위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는 개인적 차원
에 수렴된다. 영화도 보고 역사도 배워보겠다는 꿩먹고 알먹고식 관람을 지향했던 분이라면 정중히 다른 영화를 권한
다. 나는 개인적으로 내면에 갈등을 지닌 중년 남성이 갈등, 혹은 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해결해 나간다는 느슨한 공통
점에서 <쉘 위 댄스>를 연상하며 관람했다.
중후한 외모에 신경질적이며 나약한 내면을 동시에 표현해 낸 콜린 퍼스는 이 역할로 아카데미 상과 영국 아카데미
상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로 영국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헬레나 본햄 카터. 넓은 범위의 역할로 접할 수 있었지만, <파이트
클럽>의 밀라도 그랬고, <스위니 토드>의 러벳 부인도 그랬고, 남자로 하여금 말려들었다가는 큰일 나겠다 직감하면
서도 정신 차리면 이미 빠져있게 하는 매력이 특히 일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매력이 중후하게 잘
갈음되어, 자기 남자의 약점을 감싸안고 해결하게 하며 심지어 위트까지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영국사를 전공한 이
를 만나면 이 영화와 관련하여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 가운데 가장 먼저 던질 것이 바로 왕비 역할이 오로지 그녀의 해
석인지 역사에 근거한 바가 있는지이다.
<킹스 스피치>는 아카데미에서 감독상과 연출상, 각본상, 그리고 남우주연상의 4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는데, 영화평
론가 오동진 씨는 그의 블로그에서 남우주연상 외의 수상에 의문을 표한 바 있고,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인 트리트
먼트>를 파고든 후라 더욱 그랬는지, '왕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것을 강요받은 어린 시절에의 트라우마 - 왕위를 물
려받게 되었다는 갈등 상황 - 내면과의 직면, 그리고 화해' 라는 3단 구조는 지나치게 뻔했다. 뻔한 이야기와 심심한
연출을 살려냈다는 점에서 콜린 퍼스에게 상이 돌아간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래도, 영화가 잘 됐다고 굳
이 감독이나 연출상까지? 아무튼 <블랙 스완>에 상반기 관람 에너지를 다 쓴 뒤로는, 영화 보면서 크게 긴장하거나 몰
입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차에 내게는 편해서 좋은 관람이었다.
이 장면은 벽지의 질감이 마음에 들어서 올렸다. 바로 위의 장면에서 보듯 상담과 발음 교정 훈련이 이루어지는 공간
은 무척 넓은 곳이었는데, 벽지의 선택과 소품의 적절한 배치 등이, 마치 안락한 다락방을 연상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
었다. 인테리어는 확실히 좀 배울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문법을 아는 사람에게 궁금한 점이 있다. 관찰한 결과 이 영화에는 극단적인 클로즈 업과 부감샷, 혹은 풀샷이
많았다. (이 용어들이 맞는 것인지도 좀 가르쳐 주기 바란다.) 인물의 얼굴에 바싹 달라붙은 장면들은 그 심리나 캐릭
터의 묘사에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고 느꼈는데, 이따금 나오는 부감샷이나 풀샷들은 의도를 짐작하기가 어
려웠다. 단순히 20세기 초중반 영국이라는 분위기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 뿐일까? 아니면 클로즈업 다음에는 부감, 다
시 클로즈업이라는 구성상의 원리가 따로 있는 것일까?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접해 왔던 처칠 역 중에 가장 못생겼던 처칠. 찾아보니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웜테일'이란 배역
을 맡았던 배우라고 한다. 본지가 오래 되어서 기억은 안 나는데, 인터넷에 뜬 사진을 보니 대악당 급은 아닌 것 같다.
해외의 기사 가운데 '가장 흡사한 처칠'이라는 표현을 읽고 나니 내 눈이 잘못됐나 하고 다시 갸우뚱거리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실제 세계에서는 그 후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말해주는 일
종의 나레이션이 나올 때가 있다. 이것도 용어가 있을 것 같은데, 아는 분은 문자로라도 좀 알려 주시라. 위 장면이 그
나레이션 가운데 마지막 것인데, 이 앞에는 왕인 조지 6세가 그의 치료사인 라이오넬에게 어떤 대우를 해 주었는지, 그
들이 함께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 나오고, 끝으로 (조지 6세의 애칭인) '버티'와 '라이오넬'이 사람 그 자체로서 어
떻게 지냈는지가 나온다. 이러한 '호칭'이나 '명칭'등의 변용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멋들어진 어감은 일본이나 미국의
언어 문화에 비해 우리가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것 같다. 이 문제는 언젠가 좀 깊이 생각해 보고 싶다.
총평하여, 그럭저럭 추천작. 사실은 평작이지만, 나는 헬레나 본햄 카터의 변주된 매력과 <캐러비안의 해적>에서 바르
바로사 선장 역을 맡았던 제프리 러쉬 할아버지의 점잖은 연기에 재미있어 하면서 잘 봤다. 뭔가 매력을 느낄 만한 점
을 발견한 분이라면 관람해도 큰 후회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