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굴다리부터 연희 삼거리까지는 벽이나 자재함, 길바닥 등에 그라피티가 드문드문 이어져 있다. 적게 잡아
도 수십 점 정도의 작품이 눈에 띄는데, 글씨의 삐침이라든지, 캐릭터의 눈 모양새라든지를 잘 살펴 보면 특히
재주가 좋은 몇 명의 작가를 발견할 수 있다.
위의 작품은 오늘 오전 산책을 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연대 정문을 기점으로 하여 오른 쪽으로 가는 도로에 많
은 흔적을 남긴 작가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작품을 보았을 때에는 어, 그 친구 걸 또 찾았네, 하고 잠깐씩 서서
글씨체를 감상해 보는 재미를 갖는데, 이 경우는 조금 고민이 됐다. 사진의 오른쪽에는 연세대의 운동장으로 진
입하는 쪽문이 있는데, 이 거울은 특히 나가고 들어오는 차량들에게 진입로의 교통 흐름을 보여주기 위해 설치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흐릿한 날씨나 해가 진 뒤라면 소형 차량, 혹은 오토바이 등은 발견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라피티는 원칙적으로 공공물의 훼손이긴 하지만, 시민이 예술의 한 양태로 받아들여 준다면 뱅크시 같은 선
물을 사회에 돌려 주기도 한다. 나 또한 표현의 자유에 대해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공공의 안전과 관련된
이 사례를 보면서는 조금 고민이 됐다. 만약 위의 그림을 그린 작가가 그리는 도중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면 나
는 그를 처벌하는 쪽에 동의했을까, 아니면 적어도 예술과 정치적 의사의 표현은 무제한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고 반론하였을까. 생각을 하며 걷다가 지난 G20때 이른바 '쥐벽서'를 그렸던 미술가에게 끝내 처벌을 내린 이들
의 세계관에 대해 참으로 유치하다고 비웃었던 것이 떠올랐는데, 마냥 폄하할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하고 중얼
거렸다.
거울에 써진 글씨는 'UOPO' 아니면 'VOPO'로 보이는데, 찾아보니 UOPO는 별 뜻이 없고, VOPO는 위키피디
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었다.
The Volkspolizei (German for the "people's police"), or VP, were the national police of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East Germany). The Volkspolizei were responsible for most law enforcement in East Germany, but its organisation and structure were such that it could be considered a paramilitary force as well. Unlike typical police in most countries, they were equipped with armoured personnel carriers and artillery and trained as military units.
Volks Polizei 에서 앞의 두 글자와 뒤의 두 글자를 딴 결과인 모양이다. 더 검색해 보니 '포포'라고 읽고, 우리
말로는 '인민경찰'이라고 번역하는 것 같다. 서브컬쳐나 청소년 문화에서는 이따금 히틀러의 책을 읽는다고 자
랑을 하거나 스스로를 사무라이, 혹은 무사 등에 비유하는 등의 과장된 남성성, 폭력성의 자의식이 보일 때가
있다. 그러한 치기 어린 혈기의 연장선상일까. 아니면 꼭 총이 아니라도 여러 수단에 의해 집회시위의 자유, 사
상 표출의 자유 등을 억압받고 있는 시대에의 일갈일까. 작가가 하루 조회수가 백에서 이백 사이인 이 블로그를
보고 답할 리는 만무하니, 혹여라도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면 어느 쪽인지 꼭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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