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던 때, 연습을 구경하러 오는 OB들이 주로 손에 들고 있던 것은 던킨 도너츠의 12개 들이
한 상자였다. 요새는 한 상자가 모두 같은 맛인 크리스피 도넛이 생겨서 서로 싸울 일이 없지마는, 던킨 도너츠의 상자
는 대개 형형색색의 다른 맛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상자를 여는 순간에 조금이라도 늦었다가는 상대적으로 인기
가 떨어지는 도너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맛있는 음식에 먼저 달려든다거나 마지막 남은 한
점을 냉큼 먹는다거나 하는 것과 같이 식탐을 보이는 일에 몹시 수줍어 하는 편이다. 십여 년 전에는 그런 성향이 한층
더했던 탓에 영 맛을 볼 수 없는 몇 종의 도너츠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크림치즈 베이글은 부스러기조차 구경할 수
없는 일이 다반사였다. 겉보기론 영 별 게 없는데, 맛보는 이들마다 감탄사를 내뱉는 통에 나는 아주 혼란스러웠다.
인천에서 등교하던 어느 월요일 아침,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간식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갖고 있던 나는
마침 엄마의 사정으로 아침을 먹지 못했다는 부득이한 상황을 만나 홀로 던킨 도너츠에 발을 들여 놓았다. 주문부터
크림치즈 베이글을 받아 들기까지 왜 초조한 기분이 들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렌지로 막 데워준 크림치즈 베
이글은 질깃하고 찝찌름한, 먹으면서 점차 우울해지는 그런 맛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맛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서울 애들은 맛있다고 먹는 음식을 내 입은 맛있게 못 먹는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늦은 귀가 길에 홍대에서 버스 환승을 했다.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십 분이 남았길래 부랴부랴 파리 바게뜨로 달려가
뭘 집어들까 두리번거리다가 플레인 크림치즈 한 통을 샀다. 며칠 전 장을 보며 별 생각 없이 사다 놓은 베이글이 있었
기 때문이다. 파는 크림치즈 베이글의 크림 치즈두께가 주간 영화잡지 정도라면 내가 바르는 양은 우리말 큰사전. 큰
호가든 컵에 콜라를 따라 놓고 영화나 한 편 보며 먹어야지,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까닭없이 '나 같은 게 살아서 오일
장 장터에서 국밥을 다 먹는다'는 시구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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