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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3

근섭이

 

 

 

 

 

 

 

 

큰집의 마루에서, 작은 TV 앞에 누워 영화를 보고 있었다. 곁에는 할머니와 큰엄마, 엄마, 작은엄마가 제사 음식

 

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TV에서 하는 영화는 길지 않은 분량의 귀신 영화였다. 큰 한옥을 배경으로 노인과 아이들이 뒤섞여 굿판을 구경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그 영화의 주된 줄거리는, 명절을 맞아 시골에 놀러간 일곱 명의 아이가 그 전에는 볼 수

 

었던 귀신을 보게 되면서 차례차례 죽어 나가는 것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에야 밝혀지는 사실은, 영화 속에서

 

큰 역할이 없고 항상 의기소침해 있던, 주인공의 동생인 '근섭이'가 첫 장면의 굿판에서 귀신과 눈이 마주쳤

 

고, 그때 귀신이 근섭이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면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생각치 못했던 결말에 깜짝 놀란 나는 그 정보를 가진 채로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 화면을 맨 앞으로 돌렸다. 그

 

런데 굿판의 장면에서 쟁쟁, 둥둥 하는 칼소리와 북소리가 나오자 등을 돌리고 음식을 하고 있던 할머니가 TV 앞

 

으로 와서 앉았다. 큰엄마와 엄마, 작은엄마는 여전히 이쪽에 등을 돌리고 음식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근섭이구나...'라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등을 돌리고 일을 시작하였

 

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할머니가, 내가 영화를 처음 보던 때에도 굿판이 나오는 첫 화면을 보면서 '근섭이구나...'라

 

고 말하고는 등을 돌려 다시 일하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잊어 버리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던 것인데. 할머니는 첫 화면을 보고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을까. 중요

 

한 인물이 근섭이인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아울러, 그런 말을 한 것도 이상한데,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똑같

 

은 자세로 똑같은 말을 다시 한 것은 어째서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 할머니

 

와 큰엄마, 엄마와 작은엄마가 동시에 일어나더니 내쪽으로 얼굴을 보이지 않으며 집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가

 

버렸다. 둘러보니 제사를 준비하던 큰집 안은 어느새 텅 비어 있었고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왔다. 무언가가

 

멀리서부터 큰집 쪽으로 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몸을 떨다가 나는 잠에서 깼다. 9월 1일 밤에 꾼 꿈이다. 할머

 

니는 십육년 전에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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