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고 처음 그린 그림은 책상 위의 수첩에 끼적인 낙서이다. 큰 정리도 몇 차례 끝나고 국토종주도 다녀오고 했으니 이제 시간 나면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 싶어 물감과 붓을 다시 꺼내었다.
큰 캔버스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 1호 정방형부터 꺼내들었다. 1호 정방형은 가로세로가 한 뼘쯤 되는 정사각형 캔버스이다. 밑그림을 슥슥.
검은색만 썼으니 순식간에 뚝딱. 나는 지금도 정말로 숨이 막힐 것처럼 웃어대었던 <멋지다 마사루>의 첫 독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길이가 애매한 직사각형 캔버스가 하나 있어서, 얼굴이 길쭉하면서 그림으로 그려두고 싶을 만큼 내게 의미있는 캐릭터가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역시 도박마 카이지 뿐이었다. 나는 <도박묵시록 카이지>를 재수하던 해의 여름에 읽었다. 서울에서 홀로 지내는 재수생활에 지쳐 사흘쯤 학원도 안 가고 고시원 근처에 만화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 그대로라면 일주일이 됐을지 열흘이 됐을지 알 수 없던 방종에 종지부를 찍어준 것이 그 만화였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라고 중얼거리며 만화방을 나섰던 것이다.
다 그린 뒤에는 고리에 걸어 말렸다. 전시효과가 괜찮아서 아예 그대로 걸어둘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맨 왼쪽은 오래 전에 그렸던 우메즈 카즈오의 주인공 얼굴.
다 말린 뒤 매트 바니쉬를 칠해 전시해 두었다. 그릴 때에는 캔버스 크기가 다 같았다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했지만 그려놓고 보니 각기 크기가 달라 오히려 색다른 재미가 생겼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걸, 이런 쪽엔 참 센스가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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