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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0

저금통을 땄다.

복음자리 딸기잼 유리병에 모으던 것이니 딱히 따고 말고 할

것은 없어도, 아무튼. 군 복무 시절부터 꾸준히 저금통을 운

영해 온 터라 백원짜리 저축은 저금통이 아무리 커져도 결과

가 초라하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지만 반 년을 모았는데 칠

만원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래 몇 년 동안 꽉 채운

저금통을 땄던 경험은 3, 4회 정도인데, 저금을 하며 세웠던

이런저런 목표들에 맞게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맘때 필

요했던 일련의 생필품들이나 조금 비싸서 미뤄뒀던 책 몇 권

을 사는 데 그치곤 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그런 결과가 저

금통을 딸 때쯤이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개인적 차원의

경제환란 때문이라 생각해 왔는데 다시 돌아보니 언제나 예

측 금액보다는 훨씬 적었던 탓에 그냥 지갑에 슥 찔러넣고

말았던 것 같다.


동전교환을 위해 찾은 은행에서는 실랑이가 좀 있었다. 동전

을 교환한 지폐는 반드시 무통장 입금의 형태로만 지불을 해 준

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그 돈을 쓸 생각인데, 그럼 여기서는
 
입금을 하시고 나는 몇 발짝 걸으면 있는 저 기계에서 다시 출금을 하란 말입니까, 하고 묻자 담당자는 네, 하고 대답

을 했다. 그 목적을 다시 자세히 물어보니 담당자는 말을 얼버무리다가 은행 측에 동전교환의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

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궁금한 점이 몇 가지 생겼다. 말하자면 은행의 행정적 편의나 절차를 위해서 내게 불편을 끼

치는 것인데, 그건 통보가 아니라 동의를 구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무통장 입금이면 수수료가 발생할텐데 그 수수료

는 내게 과금되는 것일까? 환전한 지폐를 입금해 줄 수 있는 이 은행의 통장이 없다면 지불해줄 수 없는 것일까? 동전

교환은 모든 은행의 의무사항 아닌가? 

은행원들이 하루종일 처리할 액수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 없는 돈이라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이 미안하긴 했지만 워낙
 
궁금해서 천천히 하나씩 물어봤는데, 담당자는 원래 그렇습니다, 다른 지점은 모르겠지만 여기는 그렇습니다, 관행적

으로 그렇게 해 왔습니다, 등의 답변만을 계속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일관되게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 주었는데 왜

그리 질문이 많으냐는 뻔뻔한 것이어서 나는 그 사람이 좀 얄미워졌다. 나름으로는 한 방 먹인답시고 이건 선생님이
 
맡으신 일이고, 내가 여쭤본 것은 원론적으로 누구나 의문을 가질 만한 것들인데, 조금 더 자세히 알아두시는 게 좋

겠습니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담당자는 시종일관의 표정으로 쉬지도 않고 네 고객님,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말했다. 나는 은행을 나서며 에잇, 졌네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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