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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0

정성일, <필사의 탐독> (바다출판사, 2010)





구월도 며칠 있으면 반인데, 장마같은 가을비가 거세게도 내린다.


반년 여 동안, 그간 쌓아두었던 것 뿐 아니라 새로이 검색을 해서까지 읽고 싶은 책은 대부분 읽었다. 학부생보다 댓권
 
정도는
많은 대출 한도까지 빌려다가 읽어대면서 조금씩은 정리를 해 둬야 나중에 기억도 나고 써먹을 수도 있었을 텐

데 생각
만 하다가 결국은 한 자 못 적었다. 아무도 이해 못 하는, 시구 같은 감상 몇 줄 써놓아 봐야 세상엔 물론이고

스스로에게도 무슨 도움이 되겠나 하는 개똥철학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게으름 탓이다.


이 달 들어서의 독서는 대부분 실패였다. 베스트셀러 등의 타인이 정한 기준이 아니라 관심을 두고 있는 몇 개의 카테

고리 내에서 신간을 주기적으로 읽기 때문에 너댓 권을 집어 들도록 속상한 독서를 하는 일이란 좀처럼 겪기 어려운

일인데 근래에는 그런 일이 두세 번이나 있었다. 싫은 것은 싫은 것대로 저자나 출판사만이라도 적어 두었더라면 같은

실수는 피해 갈 수도 있었을텐데.


어제는 다행히 오랜만에 즐거운 독서를 했다. 정성일의 한국영화 비평집인 <필사의 탐독>이다. 나오자마자 예약을

걸었던 것일까, 인기있는 책이라길래 하반기 내의 언젠가쯤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서가 금방 돌아왔다.


나는 개별 작품의 뛰어난 성취와 관련 없이 해당 작품이 속한 장르 전체를 통틀어 불신하는 경우를 갖는데, 그 사례

들을 관통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그것들이 독자와의 소통을 포기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주 호사스런 자위행위

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학을 연구하는 학부에 속해있으면서 그러한 장르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는 것은 무척 부

담스러운 일인데, 다행히도 영화 평론은 그 분석 대상인 영화가 대중적인 호응을 받는 예술 장르인 만큼 감상과 평론

간의 간극에 대한 인식 또한 광범위한 것이라 적지 않게 마음 놓고 지적한다. 도시, '평론가나 좋아할 영화'라는 관용

구가 생명력을 얻은 것이 벌써 몇 년 째인가?


와중에도 오동진과 정성일의 글은 문장의 맛 때문만이라도 독서의 가치가 있다는 추천을 받은 바 있다. 개인 블로그를

통해 몇 편의 글을 접한 오동진과 달리, 정성일을 읽는 것은 처음이다. 표지도 때깔이 좋아 기분좋게 집어 들었는데,

다 읽고 난 뒤에는 속았다, 싶으면서도 웃고 있었다.


독서를 섹스에 비유하는 것은, 나는 아주 직관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필자와 독자간의 상호 간 관계이며,

육체적인 쾌락과 정신적인 쾌락이 모두 존재한다. 쾌락이 어느 축에 가까웠는지에 따라 '즐거운' 이나 '의미 있는' 등

의 표현으로 갈리게 되는 것일 테다. 그래서, 표지를 감상하거나 목차를 살피면서 옷을 벗은 나는, 이쪽은 보지도 않

고 열심히 자위행위를 하고 있는 필자를 보면 크게 신경질이 나고 속이 상한다. 버림받은 기분이 되었다고 해도 좋다.

때문에 대부분의 독서에서 자위행위구나, 라는 판단이 나면 나는 재빨리 독서를 멈춘다.

서문에서부터 남발되고 있는 주관적(내 입장에서는 자폐적이라고 표현하고픈) 심상의 나열, 그리고 쉽게 익숙해지기

어려운, 명사로 끝나는 문장 등, 이 책은 자위행위라고 판단할 만한 요소가 충분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어떤 법칙

이 없어서, 나열과 같은 관습적 사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앞의 내용을 정리하거나 평가한다든지, 뒤의 내용에 소제목

식으로 단 것이라든지, 말하자면 자기가 자판을 치다가 문득 생각나서 일단 끼워 넣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이외

에, 평론가들에 의해 지겹게 반복되고 있는 예찬들, 임권택의 장인정신과 홍상수의 감성, 그리고 박찬욱의 지성에 대

한 경배 수준의 글은 분명히 평론의 울타리를 넘어선 것으로, 동의하지 않는 의견들에 대해 배타적이며 심지어 폭력적

인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독서를 멈추지 못했던 것은, 그 자위행위가 아주, 아주 성실했기 때문이다. 저렇게까지 성실하다면,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자위행위라는 것을 떠나서, 저렇게까지 성실한데 누군가는 지켜봐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주 '정성일적인' 기분. '자위행위이나, 성실하다'와 '성실하나, 자위행위이다' 사이에서 오가다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오백오십 페이지를 끝냈다. 내용보다, '독서'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자문하게 만든 책이라, 나

는 어제 받아 한 번만 읽은 책을 다시 도서관에 반납하고 온라인 서점에 한 부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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