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기(無支祁)는 전설 속의 수신(水神)의 이름이다.
무지기가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상고 시대인 우임금 때이다. 평화로운 때를 가리키는 '요순시대'라는 말
은 요임금과 순임금이 통치했던 시대를 말한다. 우임금은 범람하기 일쑤였던 황하의 치수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
끈 공적을 인정받아, 바로 그 순임금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다. 기록에 의하면 우임금이 치수 작업을 한 기간
은 9년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옛 기록에서 9년은 단지 십 년에서 한 해 모자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
척 긴 시간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긴 시간이 소요되다 보니, 그 간에 여러가지 괴상하고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무지기는 회수(淮水)와 와수(渦水)의 수신(水神)이다. 회수(淮水)와 와수(渦水)는 중원에서 시작하여 동남쪽으
로 흐른다. 지금의 양자강, 곧 장강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 강의 수신인 무지기가 우의 작업에 계속하여 훼방
을 놓았다. 기실 강의 범람은 인간에게나 피해이지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해마다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
니, 물의 신인 무지기가 치수 작업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임금은 여러 신하를 시켜 그를 제지하고자 하였으나 계속하여 실패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무지기의 키는 15m
에 달하며 목이 자유자재로 늘어나고 힘이 코끼리 아홉 마리보다 셌다고 한다. 이 묘사는 아마도 장강에 사는 큰
어류나 아니면 장강 그 자체가 갖는 파괴력에 대한 민중의 공포심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몇 차례의 시도 끝
에, 우임금은 마침내 쇠사슬로 무지기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무지기의 처분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강소성(江蘇省)의 균산(龜山), 혹은 군산(軍山) 아래에
가둬두었다는 것이고, 하나는 쇠사슬로 꽁꽁 묶어 회수의 강바닥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산 아래에 갇혔다는 첫 번째 결말은 무지기의 외모가 큰 원숭이와 흡사했다는 묘사와 결합하여 후에 <서유기>에
영감을 주었다는 설이 있다. 곧, 손오공이 오행산 아래 깔려 있다가 삼장법사의 도움으로 빠져나오게 되는 설정
이 무지기의 이야기로부터 발원했다는 주장이다. 중국의 대표적 문학가인 루쉰이 대표적으로 이런 주장을 하였
고, 근래 <서유기>의 신선한 재해석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는 만화가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서유요원전>
도 어느 정도 이 설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후세에 보다 광범위하게 퍼진 것은 강바닥에 던져 버렸다는 두 번째 설이다. 앞서 말하였듯 무지기는 장
강 물줄기의 강한 힘을 비유하는 상징일 가능성이 높다. 이 물의 힘은 치수작업에 의해 제어되고 안으로 수그러
든 것 뿐이지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무지기를 묶어 다시 강 안으로 넣었다는 쪽이, '치수'에 대한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인식에 보다 효과적인 상징으로 작용해 더 호응을 얻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무지기는 그로부터 긴 시간이 지나 8세기 당나라 때에 다시 등장한다.
회수 인근의 초주(楚州) 라는 지방에서, 한 어부가 낚시를 하다가 큰 것이 걸린 것을 느꼈다. 혼자서는 도저히 끌
어올릴 수가 없는 것을 알고, 이 어부는 물 속으로 들어가 무엇이 걸렸는지 살펴보았다. 낚시는 거대한 쇠사슬에
걸려 있었는데 쇠사슬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부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다음날 초주의 자
사(刺史) 에게 이런 일을 고했다. 자사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지방자치단체의 단체장을 가리키는 관직명으로, 이
때의 자사의 이름은 기록에 따라 이탕(李湯)이기도 하고 이양대(李陽大)이기도 하다.
자사는 수십 명의 어부들에게 명하여 쇠사슬을 끌어올리게 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안 되어, 50마리의 소를 매
달아 끌게 하자 그제야 쇠사슬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참 끌어내고 있는데 고요하던 강에 소용돌이가 일더니
사슬의 끝에 거대한 원숭이 모양의 괴물이 딸려 나왔다.
이 괴물의 몸은 푸른 털, 머리 부분은 흰 털로 덮여 있었으며 이빨은 눈처럼 희고 발톱은 쇠와 같았다. 눈을 감고
있다가 다 끌어내고 나자 번쩍하고 떴는데, 안광이 번개와 같았다. 괴물은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을 보다가 쇠사
슬에 매인 소들을 끌고 다시 강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사람들은 이 괴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단지 일어난 일만
을 기록해 두었는데, 훗날 사람들이 이 내용을 읽고는 무지기임을 알았다고 한다. 천 년쯤 후인 청나라 시대에도
이 쇠사슬이 발견되었다는 언급이 남아 있지만, 무지기에 관한 기록은 당나라의 것이 마지막이다.
무지기는 왜 다시 강으로 돌아갔을까. 쇠사슬에 묶여 있어 어차피 어디에 갈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보이
기는 하지만 의문은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다. 홍한주는 <지수염필>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성신(聖神)인 우가 그 발을 쇠사슬로 묶어두고 감히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가
붕어한지 이미 수천 년이며, 그것은 신물(神物)이니, 어찌 숨어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겠는가. 훗날 여러 사람
의 힘으로 끌어당겨 꺼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지기(無支祁)는 애당초 스스로 쇠사슬을 벗고 이미 뛰어올라
가버렸을 것이다. 어째서 사람의 힘을 빌어서야 비로소 물에서 나올 수 있었겠는가. 일이 심히 의심스럽고
괴이하다.
홍한주는 주로 19세기에 저작활동을 한 인물로, 당대에 유행하던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고증
학이란 거칠게 말하자면 과학적 사고를 지향하는 인문학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언급은 신화의 영역마
저도 논리적 정합성에 의거해 판단해 보고자 했던 그의 인식이 드러난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지금 보면야 애
당초 논할 수 없는 분야를 논한, 무리하다고도 할 수 있고 무의미하다고도 할 수 있는 시도이지만, 나는 그 거대
한 간극을 한 필의 붓과 한 사람의 머리로 고찰해 보고자 했던 용기와 낭만이 부럽다. 무지기는 왜 다시 강으로
돌아갔을까. 나는 돌아가는 그 등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을 것만 같다. 그림의 원화는 테라다 카츠야의 <서유기
전대원왕(西遊奇傳大猿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