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소설로 읽은 적이 없다. 80년대의 유년기에 월간잡지 '보물섬' 에
이희재 씨가 만화로 연재했던 것을 읽은 것이 전부이다. 그나마도 보물섬은 워낙 만화만 가득했기 때
문에 부모님이 사 주기를 꺼려했던 것도 있고, 거친 펜 터치나 비루한 일상의 묘사 등이 둘리나 하
니, 펭킹 라이킹 등의 명랑 만화에 익숙한 꼬마의 눈에는 낯설었던 것도 있어서 딱히 챙겨 보는 만화
는 아니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꿈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음탕한 노래를 부르거나 아주 걸진 욕
을 입에 달고 사는 주인공만 봐도 이 작품이 딱히 아이를 위한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다. 나는 갈보라
는 단어를 이 만화에서 배웠다.
그 가운데, 주인공 제제가 예쁜 색지를 볼 때마다 모아서 이어 붙여 큰 풍선을 만들었는데, 성미가
악독한 큰누나가 그 풍선을 찢어버린 에피소드가 있었다. 조각조각 아름다운 무늬가 들어간 천들이
이어져 한 장 가득 예쁜 풍선으로 그려진 것이나, 아무런 이유없이 그것을 찢어버린 큰누나의 심술,
거기에 의기소침해 하거나 슬퍼하기 전에 열 살도 더 차이나는 누나에게 악다구니를 퍼붓는 주인공
꼬마 등이, 내게는 큰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남겼던 것 같다'라고 쓴 이유는, 이희재 씨의 만화를 보았던 기억은 커녕 보물섬이라는 이름조차 가
물가물하던 차에 청계천에서 위에 올린 사진의 등불을 본 순간 그 모든 것이 뭉뚱그려져 머리 속에
서 팟하고 팝콘이 터지듯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진의 등불은 사실 태양계의 토성을 표현한 것이지
만, 제제의 풍선이 실제로 눈 앞에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이 생겼을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결말은 어
찌 되었을까. 착한 작은 누나가 새 풍선을 사 줬는지, 아니면 제제가 라임 오렌지 나무에게 이런 일
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울고 말았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20년 전의 일인 것이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이희재 씨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2003년에 복각되어 재출간된 바 있
었다. 그 만화를 다시 읽고 싶었던 것이 나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알라딘에 재고가 있길래, 한 권을
주문했다. 더 많은 것이 기억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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