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09

3월 25일





연구실에 앉아 있다 민추에 가고, 끝나면 다시 돌아와 잠시라도 연구실에 앉았다 새벽녘에 목욕탕

에 가 쪽잠을 청하는 날이 계속된다. 비장의 연구를 진행중인 것도 아니고, 동료들에 비해 월등한

성취를 보이는 것도 아니며 그저 닥친 일을 해결하는 것 뿐인데도 사정은 편하지 않다. 불규칙한 생

활 탓인지, 농 삼아 말하듯 나이가 든 탓인지, 며칠만에 한 번 인천에 잠시 들러 눕기라도 하면 군에

있을 때조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알람이 귓전에서 울리는데도 여남은 시간쯤 까무러쳐 있기 일쑤

다. 그러다 보면, 지금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이 마치 내 일생의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인

양 여기게 된다. 남의 작은 말에 상처받고, 스스로의 작은 실수에 자책한다.


어제, 권 새색씨 사마께서 나와 친구들이 신혼 집으로 놀러오는 꿈을 꾸었다고, 언제라도 좋으니 오

라는 문자를 보내 주셨다. 두어 번이나 보내 주시는 문자에 한 차례밖에 답하지 못했지만, 앞서의

수업이 늦게 끝나 민추로 총알같이 쏘는 택시 안에서 창밖으로 침침한 서울의 하늘을 보는데 마음이

흔들, 하였다. 그녀는 어제가 지연의 출산 예정일이라는 정보도 전해 주었다. 축복의 문자를 보내자,

예비 모친께서는 오히려 내 일상의 행복을 답으로 빌어 주었다.


빨래거리를 해결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러 인천에 들렀다가, 두어 시간이라도 책 좀 보려 꾸역꾸

역 다시 서울로 왔다. 또 며칠간의 살림살이를 풀어 놓고 일거리와 공부거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지

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희는, 이제 같이 늙어가는 한 학번 아래의 동생들 가운데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을만큼 빨리 챙기기 시작한, 학부에서의 후배이다. 이런 공식적인 소개가 스스로도 어색할만

큼 그 뒤로 삶에서, 그리고 무대에서 무수한 줄을 서로 엮었고 이제는 오히려 내가 크게 의지하고 있

지만, 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항상 안타깝게 마음만을 전하고 말 뿐이었다. 내가 마음을 주는 이들

은 대체로 먼저 연락 안 하기로 악명이 높은 자들인데 그 중에서도 하이클래스인 지희에게서 연락

이 왔으니, 오죽 반가웠을까.

이십대 후반의 삶은 넉넉한 시간을 주어도 전화로 전하기가 어렵다. 후일을, 그러나 이번에는 반드시

꽃피는 근일일 것을 기약하고, 전화를 끊고는 연구실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 보니, 봉 보야지 호의 캡

틴 각께서 새 블로그를 마련한 소식을 남겨 주셨다.


언제나, 사람 뿐이다.


하다 못해 삼십 분이라도 책을 보려 인천에서의 편한 잠자리를 마다하고 밤이 다 되어서 서울로 온

것이지만, 채워진 마음을 굳이 남기고 싶어 한 줄을 적는데도 한참이 걸리는 스물아홉의 초봄 밤에

- 쓰다.

'일기장 > 2009'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월 29일  (1) 2009.03.29
3월 26일  (1) 2009.03.26
아사노 이니오, <빛의 거리>  (1) 2009.03.24
에잉  (0) 2009.03.23
3월 10일  (1) 2009.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