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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2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지 이틀이 지났다. 전국 최종 투표율은 75.8%로 이명박 현 대통령이 당선되었던 지난

 

17대 대선의 63.0%에 비해 10% 이상이 상승해, 이 선거에 몰린 국민적 관심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결과는 새누

 

리당의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 씨가 약 1,580만 표를 얻어 51.6%의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양강 구도의 한 축이었

 

던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는 48.2%의 지지율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표 차이는 약 백만 표였다.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정밀한 분석은 후일을 기약해야 하겠지만, 승패의 향배는 50대의 표에 있었다는 것이 선

 

거 직후부터의 중론이다. 20대의 65.2%와 30대의 72.5%라는 투표율은,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대선 전의 열기

 

어린 예측에 미치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분명 이전에 비해 진일보한 정치의식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수치였다.

 

그러나 50대의 결집력은 한층 강했다. 이번 선거에서 50대의 투표율은 무려 89.9%로, 그 다음으로 높은 세대인

 

60대 이상의 78.8%보다 11% 이상 높았다.

 

게다가 단지 투표율만 높은 것이 아니었다. 세대별로 지지하는 후보가 명확히 갈리는 특징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16대 대선, 그러니까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가 맞붙었던 2002년의 대선과 비교해 볼 때, 2030 세

 

대가 전체 유권자 중에 차지하는 비율은 48.3%에서 38.3%로 십 년 간 10% 감소한 반면, 50대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은 29.3%에서 40%로 10%포인트 이상 증가하였다. 사람의 수도 많고 투표율도 높은 세대가 선택한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필연이었다는 말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해석의 목소리가 분분하다. 선거 직전 있었던 TV토론에서 이정희 후

 

보의 날선 공격이 안정 희구층인 50대에게 오히려 등을 돌리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분석도 있고, 안철수 씨와의

 

단일화가 무난하지 않은 탓에 그리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개중에는 박근혜 후보의 우월성 때문이라는 속 편한

 

분석도 있고 하니, 이것만은 좀 더 후일에, 더 많은 목소리를 들어본 뒤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선거가 끝난 뒤 박근혜 후보는 바로 인수위 구성에 착수하였고, 문재인 후보는 실패의 책임을 본인에게로 돌린

 

뒤 더는 대선에 나오지 않을 의사를 밝혔다. 선거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번 대선의 가장 큰 축이었다고 해도 좋

 

을 안철수 전 후보는 투표 직후 미국으로 떠났고, 도착하여 선거의 결과를 들은 뒤, 계속해서 정치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박 당선인의 대통령직 인수위의 구성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고, 문재인 전 후보는 정계

 

은퇴의 뜻을 넌지시 비추긴 했지만 아직 부산 사상구의 19대 국회의원이기도 하며, 안철수 전 후보는 한동안 국

 

내 정치를 관망하고 있을 듯 하여, 이들의 향배 또한 좀 더 지켜본 뒤 쓰는 것이 맞을 듯 하다.

 

 

 

 

나 개인으로 말하자면, 딱히 무슨 일을 손에 쥐지 못하고 다소간 축 처져 있는 채로 하루를 보냈다. 투표 전일

 

'투표하러 인천 간다'고 여덟 자를 적는데 네 시간을 보냈다고 이 바로 앞의 일기를 쓴 바 있었다. 문재인 후보의

 

당선만을 두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더라면 딱히 상념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짧게는 지난 10.26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와 4월 총선부터, 길게 잡으면 참여 정부에서부터까지, 이른바 범진보

 

진영의 '맏형' 민주당의 수권 능력에 대해 의심을 품고 '비판적 지지'에 회의를 가져온 진보 진영 유권자는 나만

 

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힘을 발휘하기 보다는, 한나라당의 대척점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라는 구도

 

에서만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경우가 많았던 최근 민주당의 역사는, 거칠게 말하자면 끊임없이 북한과의 구도를

 

설정하여 입지의 당위를 증명하는 한나라당의 오랜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왔던

 

민주이 총선과 대선이라는 큰 경연장에서도 혁신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 판에야 열렬한 지지의 마음이 들지 않

 

았던 은 내 안의 당연한 인과라 하겠다.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흠모를 논외로 치고, 대통령 노무현과 참여 정부, 그리고 집권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실정이 이명박 정부라는 괴물을 낳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괴물의 비상식적인 5년을 겪어낸 국민들이 미안함

 

반 기대 반으로, 예를 들어, 이번 대선에서 다시 민주당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쳐 보자. 준비되지 않고 의지도

 

없는 채로 또 한 차례의 실정을 보여 준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5년은, 헌정 이후 바람 잘 날 없었

 

던 진보개혁 세력이라지만 향후의 행보에 유례없는 재앙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

 

다면 박근혜 씨가 19대 대선에서 80% 이상의 지지율로 당선될 가능성도 낮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민주

 

당의 집권을 열렬히 앙망하지는 않았다.

 

 

 

 

한편으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다면 여의도에 가서 할복자살하겠다는 마음도 딱히 갖고 있지는 않았다. 정치적

 

인 호오를 내려두고 지금까지 접할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로만 판단하더라도, 박근혜 정부 5년은 이명박 정부 5

 

년을 잊을 만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위정이 펼쳐지리라 본다. 국민 일반의 유신 시대에 대한 향수의 마음을, 과거

 

사 정리와 학술적 연구로 무 베듯 잘라낼 수 없었다면, 차라리 직접 다시 경험해 보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으로

 

털어낼 수 있는 방법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보수 진영의 실상과 무능을 밝히고 때만 되면 고개 드는 박정희 영

 

웅론을 청산하는 데에 박근혜만한 적임자는 다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당기(當期)적 비용은 대단히 비쌀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가치가 있는 수업이다, 라고 최근 들어 생각해 왔던 터이다.

 

 

 

 

결국, 민주당이 집권해도 찝찝함은 있는 것이고 새누리당이 집권해도 -의도치 않게- 역사적 의의는 남겨질 것이

 

라, 마음이 엉덩이 깔 자리를 찾지 못해 심사가 복잡했던 것인데. 박근혜 씨의 당선을 바라보는 내 마음을 관찰

 

해 보자그래도 내심으로는 문재인 씨의 당선을 아주 더 많이 바랬던 것 같다. 담담히 일기를 쓰고 있지마는

 

이틀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마음은 '이런 코미디가 있나...'라는 충격에서 몇 발짝 벗어나지 못한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저 혼자 책이나 읽는 직업을 갖고 사회의 파랑이 적게 미치는 변방에서 지냈던 삶조차 무척이나 피곤했던 5

 

년이 이제 겨우 끝나가는데, 얼마나 더 깜깜한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5년이 새로 추가되었다.

 

그 앞에서 나는 '해는 저물고 길은 멀다'는 뜻의 '日暮途遠'이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렸다. 해가 저물고 길은 멀었

 

을 때, 사람마다 그 나름의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벌써, 여기저기서 '힐링 행사'의 기획이 들려오고, 한겨레 신

 

문이 창간되던 때처럼 국민주를 모집해 국민 방송사를 설립하자는 결기 찬 소리도 들려온다. 새로운 흐름에 내

 

목소리가 섞여들 틈이 있을까는 아직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다만 이제까지 간헐적으로 '일기' 카테고리에 올리던

 

정국, 시국 상황 정리와 내 단상을 정리하던 것을, 박근혜 정부에 대한 카테고리를 신설하여 분명하게 기록해 두

 

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 이제로부터 며칠 간의 뉴스는 그모아오던 즐겨찾기의 '2012 대선' 폴더에 마저 넣

 

어두고, 인수위의 출범 소식을 1호로 하여 '박근혜 정부 수위' 폴더를 시작할 것이다. 차근차근, 지치지 말고.

 

영웅의 혁명처럼이 아니라 주부의 생활처럼. 이것이 긴 밤을 앞에 둔 나의 첫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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