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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2

석득

 

 

 

 

 

 

 

늦은 새벽, 문과대의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집에 가기 위해 짐을 쌌다. 전열기 앞에 앉아있다 보니 뻑뻑해진

 

눈을 비벼가며 1층으로 내려갔는데, 로비의 사방 문이 모두 잠겨 있었다. 몇 달 전, 문과대에 대도둑이 출몰하여

 

새벽 한 시 이후로는 문을 잠궈두었던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항의 탓인지 딱히 이유 같지가 않아서

 

그랬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24시간 개방으로 돌아갔는데, 주말이라 잠겨 있었던 것일까. 시계를 보니 네 시

 

오십 분이었다. 다섯 시 쯤엔 수위 아저씨가 첫 순찰을 도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십 분 정도야 뭐, 하며 소

 

파에 앉았다.

 

 

 

문과대의 1층은 말하자면 네모난 국자 모양이다. 국자 부분이 소파와 자판기 등이 있는 로비이고, 국자와 국자

 

손잡이가 연결되는 부분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별로 이용하

 

지 않는 국자 손잡이 부분에는 문과대 사무실과 교수 휴게실, 그리고 두 개의 강의실이 있다. 저 - 멀리 있어 자

 

판기의 조명이 설핏설핏 닿는 국자손잡이 쪽 복도를 쳐다보고 있자니, 열 살 정도 위의 선배님이 이야기해 주었

 

던, 그 쪽에 있는 강의실에 얽힌 전설이 떠올랐다.

 

 

 

 

 

민주화 투쟁 시절의 이야기이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교수님들도 조국 발전에 힘쓰는 학생들이 때로 수업에 들어

 

오지 못하거나 과제를 제출하지 못해도 관대하게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편이었는데, 유독 까다로운 교수님이

 

있었다. 운동은 운동이고 공부는 공부라는 신념이 있으셨는지 아니면 장군님의 치세에 감복을 하셨는지, 아무튼

 

세 차례 결석과 레포트 미제출은 곧 낙제라는 원칙을 갖고 계신 교수님이었다.

 

 

그 교수님이 앞서 말한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시던 학기, 국문과의 한 남학생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두 차례의

 

결석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두번째의 결석을 했던 그 다음 번 수업 시간, 예의 학생은 수업이 끝나기 몇 분 전이

 

되어서야 강의실의 뒷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왔다. 교수님은 그것을 출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세차례의 결석과

 

레포트 미제출을 한 학생은 결국 F를 받았다. 그리고 그 학생은 얼마 뒤 투쟁을 하던 중 죽고 말았다.

 

 

그 이후의 일이다. 밤에 그 강의실을 지나는 학생들로부터 묘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살짝 열린 문 틈 사이

 

로 석득석득석득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 궁금하긴 하지만 야밤에 빈 강의실

 

을 엿볼 용기는 없어 다들 수군거릴 뿐이었다. 그러던 중 한 학생이 야밤에 그 강의실을 지나다가 우연히 문 틈

 

이를 쳐다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다리가 없고 온 몸에 피칠갑을 한 한 남학생이 칠판 가득 레포트를 쓰고 있

 

었고 분필이 칠판을 스칠 때마다 석득석득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이야기를 다 떠올린 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자판기 옆의 유리문에 다가가, 있는 힘을 다해 손잡이 사이에 걸린 고

 

리를 벗겨내고, 이전에는 한번도 손 대 본 적 없었던 아래위의 잠금 장치를 맨손으로 풀고는 아주 천천히 문과대

 

밖으로 걸어 나갔다. 뛰기 시작하면 끝장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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