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집에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러 갔는데 사촌동생이 왔다. 고등학생이라고 이삼 년 정도 빠졌는데 수능이 끝나고
나니 핑계가 없어진 모양이다. 사정을 물어보니 지원한 대학에 모두 떨어졌다 한다. 수능 전에도 성적과 희망 대
학 간에 차이가 있어 재수를 하네 마네 갈등이 있었던 모양인데, 다 떨어진 바에야 다시 공부하는 수만 남은 것
이니 어찌 보면 잘 된 셈이다.
일찍 장가를 가서 한두 살 터울의 아들을 둘씩 낳은 큰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달리, 작은아버지는 마흔이 다 되어
서 장가를 갔고 딸만 하나 두었다. 네 명의 사촌오빠 중 막내인 내 동생과도 열두어 살 차이가 나는 통에 사이는
대체로 서먹하지만, 그 중 셋째인 나와는 내가 재수를 할 때 서울의 작은아버지 댁에 잠시나마 얹혀 살았던 적이
있어서 살갑게 지낸다.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면 아파트단지 입구로 유치원 봉고버
스를 맞으러 가기도 하고, 날씨가 좋은 주말에는 손을 잡고 인근의 공원을 산책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동생이 자라서 수능시험을 치고 재수를 하게 됐다. 재수라는 경험을 공유하게 된 기묘한 기분 때문이었
는지 아끼는 동생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제사상을 기다리며 고모부들이 잔뜩 부어준 술 때문이었
는지, 나는 동생을 앉혀놓고 이런저런 군소리를 했다. 별다를 것 없는 내용이었지만 그마저도 나눌 사람이 없었
던 것인지 동생은 서울 행 버스가 끊길까 먼저 일어나는 내 뒤를 따라오며 곧 만나 다시 이야기할 것을 기약했
다.
동생에게 해준 이야기 가운데에는 함께 살던 시절인 내 재수 생활에 대한 것도 있었다. 그 탓인지 자정이 다 되
어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꾸뻑거리며 조는 가운데 그간 잊고 있던 스무 살의 몇몇 장면들이 떠올랐다. 특히 아,
하고 탄성을 내었던 것은 자전거였다.
학원에서 돌아오면 여섯시 반. 밥을 먹고 열 시까지는 그 날의 학원 수업을 복습하고 그 뒤부터 취침 전까지는
수학이나 물리처럼 못 하는 과목을 따로 공부하였는데, 열 시에 복습이 끝나고 난 뒤 나는 잠깐씩 자전거를 탔
었다. 장바구니가 달렸고 기어가 없는 작은어머니의 자전거였는데, 그걸 타고 밤의 아파트 단지를 돌고 있으면
귀 사이를 누비는 봄밤의 공기, 코를 찌를 것 같다가 금세 은은해지는 꽃향기, 평화롭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
소리 등, 하루동안 한번도 맛보지 못했던 '즐거움'울 흠뻑 느끼곤 했다. 이십 분 삼십 분씩 타지는 못 했지만 그
것만으로도 또 하루를 버티기엔 충분했던 기억이 난다.
삼십대의 취미 생활이자 운동 수단으로 전기 자전거를 눈여겨 본지 일 년여가 되어간다. 4대강 자전거 종주 길
도 올 해엔 한 번 완주해 보고 싶다. 그러나 그런 원대한 목표가 이루어지거나 말거나, 봄이 오고 훈풍 불면 한강
에 가 빌리는 자전거라도 타고 달리고 오겠다. 스무살 때만큼의 흐뭇함이 있을까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음의
굳은살은 많이 벗겨내고 오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