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발매 예정, LEGO Cuusoo 시리즈의 다섯번째 작품인 21104 'NASA Mars Science Laboratory Curositry
Rover"이다. 우리에게는 흔히 '큐리오시티'로 알려진 화성 무인 탐사선을 레고 모델화한 제품이다. 지난 2012년
화성에 안착한 큐리오시티는 화성에서의 일식 장면을 촬영하거나 표면의 물을 발견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이루
어 왔으며 가장 최근에는 식물로 보이는 물체의 사진을 전송하여 다시 한 번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밀스런 레고 매니아이자 한때의 천문학 지망생도로서는 이 콜라보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지만, 굳이 일기에
따로 쓰는 정성을 보이는 것은 이것이 Cuusoo 시리즈의 제품이기 때문이다.
Cuusoo는 공상空想의 일본어 발음인 쿠소우くうそう를 영어로 표기한 것으로, 본래는 일종의 레고 창작 사이트
의 이름이다. 가입자가 스스로 만든 창작물의 사진과 설명을 올리면, 다른 누리꾼들은 그 리스트를 보고 개중 특
히 잘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작품에 투표를 할 수 있다. 만 표가 넘는 제품은 2008년부터 Cuusoo와 제휴를 맺은
레고 본사로 전달된다. 레고 본사에서는 그렇게 추천받은 작품 중 상업성이 있는 것을 골라 레고 사의 전문 디자
이너들의 리포밍 과정을 거쳐 Cuusoo 시리즈의 정식 제품으로 출시한다. 출시된 제품의 디자이너는 제품의 총
판매액 중 1%를 수령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레고 사가 펼치고 있는 적극적 고객 이벤트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Cuusoo 시리즈의 제품들이 의외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기성의 레고 제품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시리
즈 아래 소형, 중형, 대형 제품군을 배치하고 여러가지 전략을 통해 그 모두를 수집하게 하는 수익 모델을 추구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배트맨' 시리즈를 출시한다 치자. 그러면 가장 작은 소형 제품군으로는 배트맨 피규어 하나에 작은
오토바이 하나, 중간 크기인 중형 제품군으로는 악당의 자동차와 배트맨의 텀블러 한 대씩, 가장 큰 대형 제품군
으로는 배트맨의 기지인 배트 케이브, 이런 식으로 배치를 한다. 그런데 주인공인 배트맨만 해도 각각의 제품
에 들어 있는 모양이 조금씩 다르거니와, 배트맨 외의 다른 피규어들도 나누어져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제일 큰
제품 하나를 산다고 해서 전부를 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울며 겨자먹기로 자신의 마음에는 그렇게까
지 들지 않았던 다른 크기의 제품도 사서 모을 수 밖에 없다. 레고는 주로 이렇게 돈을 번다.
따라서, 뒤집어 생각해 보면, 아무리 매력적인 소재라도 소형, 중형, 대형 모델을 모두 만들 수 없는 시리즈는 출
시될 수가 없다. 레고로 나오면 대박 칠 것 같은데, 라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문화 컨텐츠들이 결국 출시되지 않
는 이유도 결국은 돈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 소개한 CUUSOO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단일 제품의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
로 자유롭다. 표현하고 싶은 제품 하나만 딱 표현하면 된다. 덕분에 이 시리즈에서는 아주 창의적인 작품이나
꼭 만나보고 싶었지만 상업적인 선택에 의해 출시되지 못했던 모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예를 들면 Cuusoo 시리즈의 두 번째 제품인 'Hayabusa'가 그렇다. 이 제품의 모델은 일본의 소행성 탐사 위성인
하야부사이다. 하야부사는 2003년 세계 최초로 달 이외의 천체에 왕복 탐사를 시도한 위성이었다. 그러나 소행
성에 접근하는 과정과 착륙, 그리고 귀환 과정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고 엔진 등 주요기기가 고장났으며
심지어는 통신마저 끊어졌다. 그런데 7년이 지난 2010년, 기적적으로 귀환을 해 일본의 과학계는 물론 일본 사
회 전체에 감동과 자부심을 안겼던 바 있다.
하야부사는 그 스토리가 (최소한 일본 내에서만이라도) 분명한 시장성을 갖고 있었으며, 함께 시리즈로 발매할
다른 제품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에서, Cuusoo 제품으로서의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 이 제품은 발매 후 큰 성
공을 거두었다.
난 하야부사를 전혀 몰랐고, 알게 된 지금에도 여전히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의 제품은 어떨까.
Cuusoo에 처음 창작품이 올라왔을 때부터 선정과 출시에까지 연이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21103 "The
DeLorean Time Machine'이다. 80년대에 성장기를 거친 소년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영화 '백투더퓨처'
의 상징과도 같은 자동차, 드로리안을 표현해 낸 작품이다. 이 제품은 레고 팬 사이트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불
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언론의 경제나 문화면 기사에서도 몇 차례나 비중있게 다루어진 바 있다.
이 작품은 시리즈의 네 번째 제품인데, 레고 사는 여기서부터 천사 같기도 하고 악마 같기도 한 특유의 전략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박스 후면의 사진에서 보이듯, 이 제품 하나를 사면 '백튜더퓨처' 1, 2, 3에 나왔던 각각의
드로리안들을 모두 재현할 수 있다. 조립했다 부수고 조립했다 부수고 하면 세 모양을 다 볼 수 있는 셈이다. 그
것 참 고마운 일일세, 하고 생각하는 느긋한 팬도 있겠지만, 한 번 조립해 놓고는 진열과 감상만을 하는 게으른
팬들은 결국 세 개 사라는 말이구먼, 하고 피눈물을 흘렸다.
여담. 드로리안은 사실 레고 사의 전문 디자이너들의 손에 의해 '상용화'를 거치면서 본래의 디자인을 많이 잃었
다. 새로운 모양의 블록을 통해 신기한 디자인을 구현하면 좋겠지만 그러려면 공장에 새 주물 라인이 들어가야
한다. 레고 사로서는 디자인이 다소 투박해지더라도 최대한 기존의 블록을 활용하는 쪽이 비용 절감에 도움이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팬들 가운데에는 오랜 바람 끝에 기껏 나온 드로리안이 다소 유치한 모
양이 된 것에 분개하고 좀 더 멋진 새 모델을 올리는 이도 있었다. 사이즈가 좀 더 커지고 직접 조종도 할 수 있
게 만든 위 사진의 모델이 대표적이다. 이 모델은 현재 Cuusoo 사이트에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앗, 드로리안이 나왔다면 혹시 이 차도, 라고 생각했을 당신. 당연히 모델이 올라와 있다. 아직 상용화는 되지 않
았지만, 고스트 바스터즈 카는 여러 개의 모델이 모두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수 년 내에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
대한다.
자동차와 함께 피규어 디자인도 쨘.
기상천외한 조립법이나 엄청난 물량 공세, 혹은 유명한 문화 컨텐츠를 기반으로 한 제품들만이 인기를 끄는 것
은 아니다. 현재 CUUSOO 사이트에서 만 표를 넘은 몇 개의 제품 중에는 위 사진과 같은 것도 있다. 그냥 '새'이
다. 특별한 스토리가 얽힌 새도 아니다. 조립법도 몇 차례 레고 창작을 했던 이에게는 전혀 어려운 수준이 아니
다. 그래도, 만들면서 즐겁고 만들어 놓으면 예쁜 제품은, 선택을 받는다.
사실 레고의 새 제품이 하나 나왔을 뿐인데 수선을 떨면서 일기까지 쓴 것은, 이것이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이
기 때문이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가끔 넋두리처럼 이야기하듯, 나는 유럽에서 태어났더라면 미술을 전공해서
레고 사의 디자이너 직에 지원했을 것이라는 꿈을 갖고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유사하게 이루어 주는 현실
적 방법이 실제로 있는데 이것을 눈여겨 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내 인생에 미안한 꼴이다. 마흔 전에는 모르겠
고, 쉰이 되기 전에는 반드시 실천해 보려 한다. 무엇을 만들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 하루 뒤의 업데이트. 이 일기를 쓰던 날인 1월 30일, 신기하게도 레고 본사가 다음 Cuusoo 제품은 'Ghost
busters' 자동차가 선정되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2013 가을 시즌 Cuusoo 사이트에서 만 표를 넘은 모델은 총
7개였는데 그 중 두 개가 'Ghostbusters' 자동차라고 한다. 두 개 중 선정작을 고른 이유는 '레고 디자이너가
선정된 모델을 더 좋아해서'라고 전해졌다. 선정작의 사진을 함께 싣는다.
포장을 많이 받은 앞태.
진실을 가늠할 수 있는 뒷태. 이 디자인이 어떻게 바뀌어서 나오는지도 흥미롭게 지켜보도록 하자.
개인적으로 가장 제품화되길 바랬던 위의 모델은 1월 31일 현재 232표의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인상
적인 크기와 섬세한 표현이 마음에 들어 헛된 희망이나마 가졌던 것인데. 영영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