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다. 수업을 듣는 입장일 때에는 아무리 재미없고 관심이 가지 않던 강의라도 마지막
시간에는 저마다 나름의 소회가 생기는데, 강의를 하는 입장이 되고 보면 무척 인상깊고 즐거웠던 수업이라 할
지라도 마지막 퇴근길 또한 여느날의 퇴근길과 마찬가지로 저녁 반찬에 대한 고민 이상의 무엇이 생기기 어렵
다. 굳이 더 꼽아보아도 다음 학기까지는 출근 안 하네 정도가 다일텐데.
이번 학기에는 전반기에 두 반, 하반기에 두 반, 총 네 반을 가르쳤다. 그 중 하반기에 강의를 했던 두 반 중 한
반의 학생들이, 1학기의 마지막 강의였던 오늘, 수업이 끝난 뒤 선물로 롤링페이퍼와 호두파운드 롤케익을 주
었다.
실력으로야 일천하지만, 마음의 경력으로라면야 음식 선물 정도에 일희일비하는 시점은 참여정부 말기 쯤에 이
미 지나왔다. 게다가 간식을 하지 않는 삼십대 싱글남에게 롤케익은 정말이지 처치 곤란한 식품이다. 한 번 자르
면 끝까지 먹어야 하니 자르기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아, 나중에 먹어야지 하고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몇 달
후쯤 발견하고는 케익에서 나는 냉장실 냄새에 결국 통째로 버리게 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다.
그러나 롤링페이퍼는 이야기가 달랐다. 학교 안에서는 정교사나 동료 방과후 교사들의 시기를 받을까 두려워 차
마 읽지 못하고, 교문을 벗어나 퇴근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서야 읽기 시작했는데, 혼자 길을 걷다가 '하하하!'하
고 큰 소리를 내며 웃은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수업 시간에 내가 흰소리를 하면 웃고 시험에 나온다고
하면 필기하고 하는 정도인 줄 알았는데, 학생들은 강의를 들으며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구나, 이런 느낌을 받
았구나, 하고 생각해 보니, 이미 지나간 시간이긴 하지만 새삼 귀중해지는 느낌이었다. 버스를 탄 뒤에도 몇 차
례 더 훑어보다가, 기말고사 기간인데도 공부를 뒤로 하고 이런 글을 쓰고 있었다니, 학생들의 마음이 재수도 각
오한 것이었구나,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마음 속 수많은 최대호의 군집 가운데에서 사춘기 문청 최대호가 감
격하여 코를 훌쩍이기 시작하는 바람에, 나는 읽기를 그쳤다.
나는, 교육이란 싹을 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싹이 자라날 수 있는 볕바른 자리를 골라 넉넉한 깊이에 묻어주고
충분한 양의 물을 준다. 그 뒤로 줄기를 키우고 잎을 틔우고 과실을 맺는 것은 결국 싹의 몫이다. 그가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자라날지 모르는 것이 교육의 진맛 중 하나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기껏
해야 너무 거센 바람이나 큰 비를 만나지 않도록 빌어주는, 하잘 것 없고 별 실효도 없는 일 뿐이라, 나는 대체로
그마저도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만한 애정을 접하게 되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힘써서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제 평생 먹었던 것
중 가장 정성스러운 태도로 호두파운드 롤케익을 끝까지 먹고, 축문(祝文)을 지어 제자들이 인문학도의 자세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학문의 신께 제의를 지내도록 하겠다. 애석하지만 학문의 신께서는 기말고사 대박이나 대입
성공, 논문 통과 등의 구체적 사안에는 응답을 잘 안 주시기 때문이다. 은총이 있길 바라며, 그들의 건투를 빌겠
다. 고맙다.
덧글.
전반기에 맡았던 두 반 가운데에도 스승의 날 즈음하여 내게 큰 감동을 안겨 주었던 반이 있었다. 초코 과자를
쌓아서 케익을 만들고 포스트잇을 이어서 롤링페이퍼를 만들어 주었던 반이다. 오늘 일기를 쓰게 된 사례와 비
하여 감동은 결코 작지 않지만, 그 날 찍힌 사진을 보면, 올 6월을 지나며 9부 바지의 첫 착용을 통해 마침내 참
된 패션 피플의 세계에 입성한 지금의 내가 보기엔 너무 남루한 행색이라, 함께 올리지 못한다. 단, 그 반의 학생
들이 마련해 주었던 롤링 페이퍼는 크기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강의록의 곳곳에 붙여두고는 눈길이 향할 때마다
웃곤 했다. 때늦은 감사의 마음이지만 여기에 붙여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