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셋에 제약회사의 전무가 되게 되었다. 삼 년 전, 제약회사 회장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회장의 딸
은 재혼이었다. 노리고 만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결혼이었다 생각했다. 장인이자 회장은 전무가
되기 전 일주일의 휴가를 주었다. 딱히 갈 곳이 없어 고향엘 갔다.
고향도 서울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서울이 아닌 주제에 서울이 되고 싶어 발버둥치는 것은 오히려 서울만 못
했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 후배는 순박하기 짝이 없어 한심했고, 일찍 세무서장이 된 친구는 적어도 고향에서는
갑 중의 갑인 자신의 처지가 서울에서의 성공보다 결코 못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 갖은 거드름을 다 피웠다.
여자를 만났다. 순박한 후배로부터는 러브레터를 받았고, 세무서장인 친구와는 자는 사이인 여자였다. 그러고
보니 세무서장인 친구는 여자가 후배로부터 러브레터를 받은 사실까지 자기에게 말해주는 사이라며 수컷으로서
의 알량한 자존심까지 몽땅 털어 자랑을 했던 것도 같다. 여자는 따라와 서울로 데려가달라 말했다.
여자와 섹스를 했다. 같이 누워있다 보니 사랑할 것 같은 기분이 들 것도 같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내에게서 전
보가 왔다. 회의가 당겨졌으니 급히 상경하라는 내용이었다. 올라가기 전, 여자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한다고.
옛날의 내 모습이 떠오르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준비가 되면 서울로 부를테니 올라오라고.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는 다 쓴 편지를 두 차례 읽어본 뒤 찢어버리고 서울 행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다보니 길가의 하얀
팻말에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쓰여져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
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처럼 쓴 이 내용은 이번 주에 강의하고 있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줄거리이다. 그때의 서
른셋이 오늘날의 서른셋과 같은 나이일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주인공과 동갑이 되어 다시 읽어보니 가슴에 선
득하게 와 닿는 내용이 더 많다. 와중, 오늘 읽은 다른 책에서, 주인공 '나'가 다시 서울에 올라가 전무가 되어 살
아 가다가, 어느날 껍데기 같은 자신을 붙잡고 강남 어딘가의 룸살롱에서 혼자 울면서 부르고 있을 것만 같은 노
래 가삿말을 보았다. 가수 김용만이 부른 <회전의자>다.
검색을 해 보니, 김용만의 <회전의자>가 발표된 것도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같은 1964년의 일이었다. 물경
50년을 앞선 선견지명에 웃어야 하나, 50년이 지나도 동병상련인 신세에 울어야 하나. 아, 먹먹해서 일기썼다,
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