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에서 나온 '기획연구'의 43권. 아는 듯이 말했지만 해당 총서 중에서 처음 읽는 책이다. 책 제목
이나 표지 디자인 등에서 알 수 있듯 딱히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책은 아니고, 인문학 대학원생에게 익숙하디
익숙한 논문 모음집이다. 크게 성의를 들이지 않은 표지가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전의 '인문 교양서'들처
럼 단색 표지의 목침 같은 책 - 어디서 연원한 말이지는 모르지만 주변의 석박사들은 그런 책을 '떡제본'이라고
부른다. - 이 아닌 것이 어디냐 싶다.
본문의 내용과 필자 중 한 명인 이평래 교수의 서문을 참고해 보면, 이 책의 기획의도는 동북공정을 포함한 중
국의 자기 위주식 역사 재구에 대항하기 위함이며, 그 방법론으로서 동북 아시아 지역에 산재해 있는 '활쏘기
신화' 간의 유사성을 분석하고 그 결과가 중국의 활쏘기 신화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과정을
싣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를 포함해 중국에 대항할 수 있었던 무력과 상당한 크기의 점거지를 가지고 있었던
세력이 있었음을, 신화의 분석을 통해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책에는 총 다섯 편의 논문이 실려 있는데, 서문에 다섯 편의 글이 논리적 순차에 따라 기획되었다고 밝히고 있
듯, 구성이 탄탄하여 읽기가 편했다. 첫번째 논문의 제목은 '한국 활쏘기 신화의 의미와 특징'. 다른 지역의 활
쏘기 신화와 비교 분석하려면 일단 한국 활쏘기 신화의 내용과 의의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두번째 논문의 제목
은 '중국 소수민족 활쏘기 신화와 의례를 통해서 본 '샤먼영웅''이다. 고대의 신화는 씨족의 성립이나 국가의 건
립 과정에서 형성된 경우가 많으므로 그 주체인 영웅이 중심인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논문에서는 다른 지역
의 신화까지를 아울러 분석함으로써 영웅의 정체와 능력, 행적 등을 밝힌다. 세번째 논문인 '에르히 메르겐 신
화의 문화적 함의'에서는 몽골 활쏘기 신화의 주인공인 에르히 메르겐을 구체적 사례로 들어 논의를 심층화 시
킨다. 개인적으로는 신화에서 북방의 자연환경이나 몽골민족의 활쏘기 방법 등과 같은 문화사적 사료까지 뽑아
내고 있는 이 논문이 가장 흥미로웠다. 네번째 논문인 '시베리아 신화와 의례에 나타난 활, 화살의 의미에 대한
연구'는 앞서의 연구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의의인 '활쏘기 신화'의 구체적 내용과 함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정
리하고, 마지막 논문인 '누가 왜 예를 말하는가'에서는 중국의 역사에 의해 정체가 훼손되거나 왜곡된 '예(羿)'
라는 인물에 대해 고찰한다.
멍청한 말로 다시 정리를 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 한국의 활쏘기 신화는 어떠어떤 내용이다. 둘, 그런데 중
국을 둘러싼 소수민족들의 활쏘기 신화를 분석해 보니, 우리까지 합해서 공통적으로 포함된 무엇이 있더라. 셋,
구체적으로 몽골에는 에르히 메르겐이라는 영웅도 있다. 넷, 그 활쏘기 신화의 의미란 이런이런 것인데, 그건
중국의 활쏘기 신화와는 분명 차별을 갖는 것이다. 다섯, 그 한 예로 '예(羿)'라는 인물은 분명 동이족인데, 중국
의 역사는 그를 화하족으로 간주하고, 혹 동이족으로 인정할 경우에는 폄하하고 있다.
결국 중국에서 행하고 있는 역사의 자의적 재구가 학문적으로는 이렇게 반박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가장 큰 목적을 두고 있는 책이다. '누가 왜 예를 말하는가'라는 제목은 사실 '중국이 무슨 권리(까닭)으로 예를
자기 역사에 포함시키려는가'인 셈이다.
근래에는 문학, 사학, 철학이 서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 대학의 근대적 학제 때문이지 학문의 속성이 본디 분리
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반성 하에 '국학'이라는 통칭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통합적 사고로 국학의 정
체를 고찰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동아시아학'이라는 화제에 다시 가 닿게 된다. 국학의 실질적인 내용인 문학,
사상, 역사 등이 지역성이나 역사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문학
을 공부하고 있는 나도 그 기록문자는 대개가 한자이며 내용 또한 중국의 고사, 명언, 인물 들이 빈번하게 사용
되고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읽고 외우는 것은 사서삼경을 비롯한 중국의 서적들이 대부분이다.
솔직히 스스로에게나 남에게나, 매력적이다. '저는 이제는 아무도 외지 않고 알려 하지 않는 옛 한시 몇 개 공부
합니다'보다, '저는 한문학을 통해 국학과 동아시아학에 접근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시쳇말로 뽀대가 난다.
와중에, 근래 참가했던 어느 학회에서 다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한국도 일본도, 근래 '동아시아학'이라는 말
이 학계에 유행처럼 퍼져 있지만, 정작 중국의 학계에서는 그런 용어를 모르거나, 알더라도 관심을 갖지 않고,
관심을 갖더라도 왜 중국학이라고 하지 굳이 동아시아학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딴지일
보의 편집장이 연재하고 있는 '아시아'에 관한 글에서, 외국 가서 서류를 작성하다 보니 '동아시아'라는 말은 없
고, 'China and others'라는 난이 있어 체크했다는 글을 읽은 것도 얼마 전이다. 동아시아, 라는 말은 결국 others
들 만의 자위는 아닐까.
나는 사실 처음에 이 책을 집어들며 다소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활이라는 무기와 활쏘기 신화가 끌렸을
뿐이지, 정치적인 이유로 시작된 동북공정에 굳이 대항하는 것도 또 하나의 정치의식 아닌가, 하는 혐의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리적인 내용과, 근래에 들었던 단상들을 합하여 다시 생각하니, 세상에 있어도 좋은
연구이거나 혹은 반드시 있어야 할 연구라고 생각하게 됐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책의 정체 자체는 논문집이므로, 기왕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에게 굳이 권하고 싶지는 않
다.
재미있었던 한 부분. '에르히 메르겐'에서 '에르히'는 엄지, '메르겐'은 우리나라의 '주몽'처럼 명사수의 호칭이
다. 이 에르히 메르겐은 본인이 했던 약속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자 엄지를 자르고 다람쥐의 일종으로 변신하였
다고 하는데, 거듭해서 엄지가 나오는 이유는, 두번째 손가락과 세번째 손가락으로 활시위를 당기는 서양인과
달리 - 이를테면 로빈 훗과 같이 - 몽골인들은 엄지와 검지 사이에 화살 끝을 끼우고 엄지로 시위를 당기기 때
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중요한 부위였기 때문에 영웅의 이름에까지 등장한 것이다. 이것이 그저 허황된 옛이야
기만은 아닌 것이, <몽골비사>에 칭기즈 칸이 아들과 심한 의견 차이가 나자 화를 내며 활쏘기 시합을 해 자신
이 이기면 아들의 엄지를 잘라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정복 왕조였던 칭기즈 칸의 때
까지 엄지는 중요하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손가락을 물어보면 어디라고 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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