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서 구입한 세 권의 책 중 마지막. 원가 12,000원에 4,500원의 값이 매겨져 있어 다른 책들에 비하면 엄청
난 할인 폭은 아니었지만 워낙 책이 두꺼운 탓에 사면서 가장 기뻤던 책이다. 물론 영미에서야 고전 소설로 인
정받는 명작이지만 아무래도 드라큘라라는 소재가 일종의 뷸량식품처럼 여겨졌던 탓에 오랫동안 손가락만 빨
아왔는데 이제 와 사게 되어 즐겁다. 그렇지 않겠는가. 누가 천 원 주고 쫄쫄이 한 줄을 사 먹나. 비엔나를 사 먹
지.
드라큘라를 소재로 한 영화가 워낙 많은 탓에 검색할 엄두도 안 나는데, 내가 제일 재미있게 보았던 것은 1990
년 무렵에 주말의 영화에서 상영해 줬던 작품이었다. 영화 전반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고, 아무튼 결말부에
서 주인공을 도와주러 드라큘라 백작의 성으로 달려온 일행들마저 모두 흡혈귀가 되고 말았다. 그들과의 격투
끝에 주인공은 겨우 여자친구만을 구해 내어 성의한 구석진 방으로 달려가 문을 걸어닫는다. 탈진하여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한차례 쉰 주인공은 여자친구를 돌아 보며 안위를 묻는데, 청순하던 여자친구가 기괴한 얼굴의
흡혈귀가 되어 화면을 향해 왁 하고 달겨드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었다. 다 끝난 줄 알고 안심하고 있던 나는 정
말로 대경실색하여, 이후로도 몇 년 간 이따금 꿈에 나오는 장면이 되었다. 식스센스가 나오기 십여 년 전이었
으니, 서울의 위성도시에 거주하며 3개 채널이 문화생활의 전부였던 소년에게는 충분히 경악스러운 반전이었다
할 수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예능의 숨은 고수 김장훈 선생께서는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여, 귀신영화의 마
지막에 깜짝 놀래키는 귀신의 장면이 실린 영화는, 감독이 자기가 만들어 놓고도 무섭지 않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육지책을 쓴 것이라고 촌철살인의 평을 날리셨다.
나는 근래 좀 허무하게 느껴져서 소설을 거의 읽지 않고 있던 터라 반이나 읽으면 다행이지 하며 독서를 시작하
였는데, 누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끝을 내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여러 화자를 설정해 두고 각자의 술
회를 교차로 편집하여 사건을 재구해 내 가는 구성은, 영화의 문법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그저 익숙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지만 당대에는 대단히 충격적인 실험이었을 것이다. (혹 영미 문학사를 전공하신 독자께서는 이것
이 브람 스토커의 실험인지, 아니면 당대에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것인지를 깨우쳐 주시라.) 아울러, 개인적으
로 가장 흥미를 느꼈던 것은, 필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던 것이 확실하지만, 주인공들이 아주 수다스러운 것이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갓 빠져나온 이가, 현란한 레토릭을 사용하며
약 한 쪽 분량에 걸쳐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든지 하는 장면이 그런 것이다. 위급한 상황을 막 피한 이가 그 정도
인데, 보통의 사람들이 '사랑한다'나 '아름답다'는 말을 표현할 때엔 어떻겠는가. 그 과장된 언사를 지켜보는 것
이 아주 재미있어서, 700여 쪽을 읽는 데에도 독서의 호흡을 늦추지 않을 수 있었다.
아울러 책의 판형에 관한 불만이 있다. 출판사인 열린 책들에서 주로 이런 흐름을 주도해 온 것 같은데, 많은 분
량의 책을 두꺼운 한 권으로 묶어 내면, 꽂아놓고 이따금 쳐다 보기에야 흐뭇하지만 정작 독서를 할 때에는 아
주 고역스럽다. 사람들의 독서 행위보다는 수집 행위를 자극하는 것이 매출에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
면 여러 권의 표지를 만들고 편집하는 것을 한 권으로 줄이면서 비용이 감소되었기 때문일까. 재미있게 읽고 났
으니 내용이 다 떠오르는 향후 몇 년 간은 이제 읽을 일이 없어 별 상관 없게 됐지만, 다음 번 독서 때에 또 투덜
거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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