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집을 사게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 가운데 하나는 10여 종의 잡지를 정기구독하는 일이다. 위 책은
희망목록에 있는 잡지들 중 하나인 주간지 <시사in>에 실리고 있는 시사만화의 모음집이다. YS와 DJ의 평생 라
이벌 구도를 그린 2009년 9월자 '용호상박 애증무이'부터 성장우선론자들의 의견을 풍자한 2011년 1월자 '파
이'까지 에필로그를 포함해 58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작가인 '굽시니스트'는 2차대전의 진행상황을 코믹하게 그려낸 '본격2차세계대전만화'를 웹 상에 올리며 유명
세를 타기 시작했다. 각 인물들의 특징을 잘 뽑아내어 캐릭터화시킨 점, 게임, 애니메이션 등의 서브컬처를 풍
부하게 활용하여 패러디한 점, 공간적 제약을 지닌 만화라는 매체임에도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 분명한 자기 기
준을 가지고 사건을 전달했다는 점 등의 장점은 곧 큰 호응으로 이어졌고 책으로도 출간되었다. 아마도 그 과정
에서 보여준 자신만의 시각 덕분에 한국의 정계를 다룬 시사만화를 의뢰받게 되지 않았을까 억측해 본다.
하나의 작품은 두 쪽으로, 보통 12에서 18컷 가량이며 등장 인물들은 위 표지그림에 실려있는대로 2-3등신으로
표현되어 있다. 주된 형태는 하나의 사건에 관해 대부분의 컷을 할애하여 그 경과를 적고 마지막의 한두 칸 정
도를 들여 작가의 평을 다는 것으로, 형식만 놓고 보자면 <사기>를 잇는 정통 역사서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주로 일종의 이야기꾼 역할을 하고 있다. 칸마다 나레이션을 적어가며 거기에 해당하는 그림들을 코믹하게 그
려내는 것이 대부분의 구성방법이고, 이따금 작가의 페르소나이며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자인 '굽시니스트'가
작중에 등장할 경우에는 대통령의 실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굽시니스트의 무조건적 지지 자체가 풍
자의 대상이므로 따로이 나레이션이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들 가운데에는 이명박 현 대통령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사건이 적지 않은 2009-
2011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현 대통령이 가장 많은 풍자를 당하고 있지만, 작가 개인만의 시각이라고 여겨
지지는 않는다. 벌린 일이 많으니 까이는 것도 많지 뭘. 이재오 씨나 오세훈 씨 등 인물이 중심인 만화도 있고,
세종시나 야당연합 등 사건에 관한 것도 있으며 한나라당의 연원, DJ의 인생 등 근현대사 관련 만화도 있다.
무상급식 등에 관한 만화들에서 다소간 진보적 시각을 읽어낼 수는 있지만, 독서를 통해 추측되는 작가의 시각
은 대체로 '보수/진보'의 틀보다는 '공정/불공정'에 맞추어져 있다. 현 대통령의 치세가 그만큼 민주주의 토론의
장을 퇴보시킨 데에도 일조한 바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한 작가가 '보수/진보'의 가름은 이미 대중에게 무용
하다는 판단을 내린 하에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하나의 시대적 징표가 아닌가 한다. 현실 세계에서 불공정한 구
조를 건축하고 그 안에서 부당한 권리를 누리는 일단의 세력들이, 그 옳지 못함을 지적하면 '공정/불공정'의 구
도에서 진행되던 논의에 '보수/진보'의 구도를 덮어씌워 논점을 흐리고 만다. 애당초 전제가 잘못되고 진정성이
결여된 토론에, 참여하여 열을 올려도 건설적인 결과는 나오기가 어렵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이 만화는 대단히
영리하게 자기 행보를 택하고 있는 셈이다.
만화는 일련의 보수 신문에서도 '만평'이라는 형식으로 오래 전부터 그 장점을 취해왔을만큼 풍자에 유용한 장
르이다. 풍자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그 함의 등을 글이 아니라 선, 효과음 등의 즉물적인 장치로 전달하기 때문
에 독자의 감성적 반응을 유발하는 데 아주 유용하다. 다만 기존의 한 컷, 네 컷 만평들은 사건을 압축적으로 전
달해야 하는 한계를 지닌 까닭에 풍자의 대상이 되는 사건이나 인물의 전말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쉽게 전
달될 수 없는 단점이 있고 또한 풍자의 강도가 지나쳐 원색적이 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에 비해 이 '본격시사
인만화'는 더 긴 분량을 통해 자신의 시각이 반영된 나레이션으로 경과를 보여줌으로써, 이 사람이 사건, 인물
가운데 특히 어느 점에 중점을 두고 접근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평을 내리게 되었는지에 대해 독자 스스로도 비
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2차세계대전만화'에 이어 이 만화 또한 화제에 올려놓은 것은 역시 내용 구성에 있어서의 재기발랄
함이다. 현 대통령의 치세 하에 일어난 일들이, 많은 경우 서로의 가치관이 아닌 이익을 두고 다투는 저열한 수
준의 것들이라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면 사람의 기운을 빼앗아 가는 것이 사실인데, 굽시니스트는 고사성어, 영
화, 설화 등의 다종한 장치를 사용한 패러디를 통해 그러한 거북함을 일면 소거해 준다. 한편으로는 심각한 문
제에 대해 지나치게 가볍게 접근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식으로 사회에서 일어
나는 문제적 상황에 대해 일단의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만평의 본래적 역할이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양쪽
에서 우려하는 바를 잘 아울러, 이 만화를 통해 화제의 사건에 접근하되 인터넷, 방송, 시사잡지 등의 여러 매체
를 통해 객관적 사실 또한 알아나가려고 한다면 좋은 시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시간 많은 나도 어쩌다 일이 몰
리는 날엔 그놈들이 짖든 말든, 싸우든 말든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 싶은 날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관
심을 갖고 작은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난세를 살아가는 시민의 의무 아니겠는가. DJ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
하셨던 것처럼, '하다못해 담벼락에 욕이라도' 해야지. 이 만화를 읽는 것은, 단언컨대 담벼락에 욕하는 것보다
는 훨씬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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