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지2016.01.03 19:25

 

 

 

 

책을 사는 속도는 똑같은데 연말이니 일이 많으니 핑계를 대다 보니, 택배 상자를 열어 당장 읽고 싶은 책만 골라 잠자리 곁에 두는데도 어느새 작은 책무덤이 생겼다. 넉넉하게 시간이 난 틈을 타 전기장판 위에 벌러덩 누워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는데, 기묘하게도 부모, 그 중에서도 엄마에 관한 만화책 두 권을 연이어 집게 됐다.

 

첫 번째 책은 홍연식 작가의 <마당 씨의 식탁>이었다. 술 마시는 아버지와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는 서울의 한 반지하에서 산다. 작가인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돌도 안 된 아들과 함께 경기도 외곽에 밭이 딸린 전원주택을 샀다. 새로 생긴 나의 세계에는 행복이 가득하다. 아내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나를 깊이 이해해 주고,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아들은 새로운 기쁨을 가르쳐 준다. 반대로 오래된 나의 세계에는 반지하 같은 일만 가득하다. 젊었을 때부터 술을 마시고 어머니를 때리곤 하던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술을 마신다. 엄마는 환갑이 넘었을 때부터 이미 심각하게 아팠다. 나는 그 두 세계 사이를 오가며 괴롭고 또 행복하다.

 

작품의 큰 얼개는 작가가 엄청나게 큰 간극의 두 세계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에 대해 솔직하게 생각하는 나레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작가처럼 부모 사이의 갈등 때문에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내지는 않았다. 다만 크게 공감하여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였던 것은 부모와의 거리감에 대한 부분이었다. 특히 엄마와의 관계가 더 그랬다.

 

나는 나를 무척 사랑해 주는 엄마를 가졌다. 엄마가 엄마로서의 자신보다 자기로서의 자신을 앞세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이따금 본가를 찾았을 때 내가 살이 빠져 있으면 엄마는 혼자 살면서 밥도 못 챙겨먹고 돌아다니는 모양이라고 침울해 하고, 살이 올라 있으면 패스트푸드 같은 거나 먹어서 그런 것은 아니냐고 침울해 한다.

 

사랑인 줄 알면서도, 나는 그럴 때마다 짜증이 난다. 지극한 관심과 숨막힐 듯한 애정보다는 적당한 거리감에서 오는 신뢰가 훨씬 더 편하기 때문이다. 천성이 그런지도 모르겠으나, 한편으로 그런 생각을 가진 '큰아들'로 키운 것은 당신들의 몫도 적지 않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몫돈을 벌어서 보약을 사 먹느라고 살이 쪘을 수도 있지 않느냔 말이다. 오래 살려고 유산소 운동을 하다 보니 살이 빠졌을 수도 있는 것인데. 앞뒤 안 재고 걱정부터 하는 모양새가, 관심과 사랑보다는 인정과 신뢰를 받고 싶었던 내게는 불쾌하다. 걱정을 하고 싶어서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어쨌든 사랑해서 하시는 말씀 아니겠나. 내가 자식을 안 낳아봐서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겠지. 등의 생각을 하며 불쾌감을 억누르지만 어쨌든 입으로는 차갑고 쌀쌀맞은 말이 나간다. 누군가가 내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준다고 치차. 내가 정말로 보고 싶지 않은 영상은 엉덩이를 벅벅 긁는 모습이나 대변을 닦는 모습 등이 아니라 차려 놓은 음식이 맛있느냐고 열 번쯤 물어보는 엄마의 질문에 쳐다도 보지 않고 차가운 표정과 음색으로 어, 맛있네 하고 대답하는 모습이다.

 

부모의 사랑에 이런 식으로 답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살갑게 대하는 것도 익숙치 않거니와 살갑게 대했다가 파도처럼 덮쳐올 관심과 애정을 감당할 자신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도 좀 원망스럽다.

 

그런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역시 엄마의 죽음이다. 우리 엄마 또한 사람이고, 사람은 죽게 되어 있다. 그 날을 맞닥뜨렸을 때, 내 안의 죄책감과 미처 표현하지 못한 사랑이 뒤섞여 버리면, 나는 버텨낼 수 있을까. 강인한 사람들조차도 엄마의 죽음 앞에서는 속절 없이 무너진다.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하필 <마당 씨의 식탁>에 그 장면이 나왔다. 주인공인 나의 엄마는 점점 더 잦게 병원을 들락거리게 됐다. 갑작스런 병원비, 갑자기 잘려나간 내 일상의 시간과 마음의 여유 등은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그러다가 엄마가 죽었다. 누구의 엄마든지 사람이니까 죽는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죽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공은 몇십 년 동안 엄마가 맛있는 반찬을 해 주던 식탁을 떠올리고, 그러다가, 자신이 엄마한테 어떻게 했었나를 떠올린다.

 

드러내 놓고 불효를 한 것은 아니다. 남에게 손가락질 받을 만한 짓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내 집으로 찾아온 엄마에게 짜증을 낸 것 뿐이다. 더 자주 올 수 없느냐는 엄마의 전화에 일이 많아서 못 간다고 말한 것 뿐이다. 나는 선득했다. 왜냐하면 신정이라고 몇 달 만에 찾은 본가에서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루 자고 가라. 새해인데 만두국 먹고 가라. 엄마. 나 일 있어. 그리고 내가 요 몇 년 동안 본가 내려와서 잔 적 있어? 분가한 자식한테 자고 가라고 자꾸 얘기하지 마.

 

일기를 쓴다고 뭐가 달라질 건 아니다. 독립한 지 십수 년이 지난 나는 몇 년이나마 내가 같이 살았던 집에서 자는 것도 불편했었고, 몇 달 전 이사하여 내 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 집에서 잘 생각은 더더욱 없다. 읽을 책도 편히 누울 곳도 없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평소 습관대로 새벽녘 쯤에 잤다가는 나중에 또 뭘 핑계로 삼아서 걱정거리를 만들어 낼지 생각도 하기 싫다. 그래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은 든다.

 

평소 마음에 맺혀있던 것 중 하나를 찔린 탓에 먹먹한 마음으로 누워 있다가 다음에 집어든 것이 <페코로스, 어머니의 보물상자>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페코로스, 어머니의 보물상자>는 이 카테고리에도 소개한 바 있었던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의 후속작이다. 환갑이 넘은 아들이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간 어머니를 모시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귀여운 그림체로 그려냈던 만화이다. 작품은 아들의 시선에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의 일상을 소개하거나 어머니와 예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기도 하고, 또는 어머니의 시선에서 이미 죽은 남편을 만나기도 하고 아들을 낳기 전인 소녀 시절의 일을 추억하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후속작이 2년 만에 출간되었길래 사 본 것인데, 작품을 읽기도 전에 책날개의 작가 소개에 이 책에 실린 내용을 연재하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우연처럼 그렇게 됐다. 덕분에, 동글동글한 그림체와 4컷 만화라는 형식에도 불구하고 내내 가라앉은 기분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 후기를 보니 본인도 작품 전체에 추모의 분위기가 짙게 배었다고 술회하고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잘 하자, 는 건 특별히 이러한 저명한 사상가가 말했다거나 이런 베스트셀러에 실렸던 내용이라고 소개할 만한 것도 없다. 엄마의 죽음과 그 정서까지 이렇게 자세하고 공감이 가게 다룬 만화책을, 우연히 연이어 두 권이나 보고 나서도 뭔가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책은 왜 읽고 공부는 왜 하는 것이냐고 질타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질타를 받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까지 억지로 벌릴 수는 없다. 일단은 신정 때 싸 주었던 고구마가 맛있었다고 문자를 한 통 보내자. 그제 잠깐 함께 걸으며 엄마는 자전거를 한 번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의 키에 맞는 자전거를 찾자. 비싼 것으로. 지금은 그것으로 용서해 줘라.

 

 

 

 

 

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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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2014.12.31 13:55

 

 

 

 

이 카테고리에는 <스승은 있다>로 소개하였던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의 9월 신작. 본래는 제목만 보고 1인 가정에 대한 내용일 것으로 오해를 하여, 우석훈 씨의 <솔로 계급의 경제학>과 엮어 독후감을 쓰려고 읽었던 책이다. 조금만 더 꼼꼼했더라면 표지 그림에서 '리스크 사회에서 약자들이 함께 살아남는 법'이라는 부제를 찾아낼 수 있었을텐데.

 

책은 최근 몇 년 동안 번역되어 나오는 그의 책들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랑', 그리고 '약자 간의 연대'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가 직접 블로그에 올린 글 가운데 해당 주제에 속하면서 아울러 화제가 되었던 것들을 묶어 책으로 낸 것이라 한다.

 

'일', '공동체' 처럼 현대인이면 누구나 관련되어 있는 소재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혹여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할지라도 특유의 유머러스한 접근법으로 개성적인 사상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읽어도 나름의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독후감을 쓰고 있는 지금은 교토 여행을 다녀와서 쌓아두었던 일 때문에 정신없는 2014년 연말이다. 곁에 두고 몇 차례 다시 읽고 싶은 책이었는데 긴 여행을 다녀와보니 어느덧 도서 반납 기한이 다가와서 급하게 쓰는 글이라, 일단 그 가운데 가장 즐겁게 읽었던 한 꼭지를 골라 옮겨 적어두는 것으로 독후감을 갈음하려 한다. 109쪽부터 116쪽까지 실려 있는 ''무인도 규칙'을 알고 있습니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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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RCUS>라는 잡지의 취재에 응했다. 주제는 '어째서 젊은이는 일을 잘할 수 없을까?...' 한쪽에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노동하지 않는 젊은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과로로 쓰러질 것 같은 젊은이가 있다. 양쪽 모두 '일을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째서일까?

  확실히 '어째서 그럴까요?' 궁금할 만도 하다. 답변을 해보자.

  첫째는 일하는 개인이 안고 있는 문제이다.

  <하류지향>이라는 책에서 분석했듯, 노동을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틀 안에서 파악하면,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성과에 대해 '등가의' 보수가 '지체 없이' '특정인 앞으로' 지급될 것을 희망한다.

  학생들이 알고 있는 '일work'의 경험은 우선 수험 공부와 취직 활동 뿐인데, 그것은 실로 노력에 대한 보수(성적이나 합격 여부)가 (합격 발표, 내정 통지 날에) '지체 없이' 노력에 상응한 평가로 특정인 앞으로 전해지는 시스템이다. 앞에서도 기술했지만, '수험=취직 활동의 동기'와 '노동의 동기'는 별개의 것이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활동을 동일한 동기를 통해 영위하려고 하다 보니 톱니바퀴가 어그러지는 것이다.

  노동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행위이며 노력의 성과가 정확하게 개인의 보수로 돌아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보수는 항상 집단에 의해 공유된다.

  개인적 노력에 대한 개인적 보수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노동이다. 개인적 노력은 집단을 구성하는 다른 사람들과 이익을 나누는 형태로 보답받는다. 그래서 더불어 노동집단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미소를 보고 '마치 내 일처럼 기뻐하는' 마인드를 가지지 못하는 인간은 노동을 할 수 없다.

  이는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 노동을 해온 사람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두 함께 일하고 그 성과를 함께 나눈다.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도 집단에 속해 잇으면 제대로 돌봄을 받을 수 있다. 일한다는 것은 본래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활동으로서는 소비라는 경험밖에 없고, '노력'에 대해서는 수험과 취업 준비라는 경험밖에 없는 젊은이들은 이런 이치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자신이 거둔 노력의 성과를 타인과 나누지 않으면 안 되는가?

  아니, 그건 내 몫이잖아?

  어허, 그게 아니라니까....

  오늘날에는 거의 읽히지 않는 <스위스의 로빈슨 가족>이라는 문학작품이 있다. 이 소설은 스위스인 일가가 표류 끝에 도착한 무인도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그 첫머리에 무인도에 닿은 뒤 해안에서 모두 어패류를 모아 부이야베스bouillabaisse(일종의 수프)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수프는 다 끓였지만 떠먹을 그릇이나 스푼도 없고, 양도 부족하다. 어쩔 수 없이 모두 작은 굴 껍데기를 돌려가며 수프를 떠먹는다. 그러자 어린애 한 명이 커다란 조개껍데기를 꺼내어 수프를 푹푹 떠먹기 시작했다. 참 요령 좋은 아이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본 아버지가 아이에게 묻는다. "넌 커다란 조개껍데기로 먹어야 수프를 더 효율적으로 먹을 수 있다는 걸 알았구나?" 아이는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네, 맞아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왜 너는 가족 수대로 조개껍데기를 주워오지 않고 자기 것만 주워온 게냐? 너한테는 수프를 먹을 자격이 없다."

  나는 아홉 살 즈음에 이 에피소드를 읽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하, 그렇구나... 집단을 이루어 사는 데 '그런 룰'에 따르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구나 하고... 메모를 해둬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 대다수는 이런 에피소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가 머리가 좀 이상한 게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경쟁적으로 분배할 경우에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행동하는 게 왜 질책을 받을 만한 일인가?

  이 룰을 받아들이면, 이를테면 주식 거래 같은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맞다. 그렇다.

  <스위스의 로빈슨 가족>에 나오는 아버지의 룰에 따르면 주식은 거래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의 룰이란 '여러 명의 인간이 무인도에서도 살 수 있는'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점을 기억해두자.

  '무인도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룰이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특별한 예'일 뿐이다. 그리고 현대의 젊은이들은 그런 '특별한 예'밖에 알지 못한다.

  '개인적 노력의 성과는 개인이 점유해도 좋다'는 것은 생존경쟁이 거의 없는 시대, 자원의 분배 경쟁에서 패배하더라도 굶어죽지 않는 안전한 시대에만 적용할 수 있는 '특별한' 룰이다. 이른바 '온실 속의 룰'이다. 패자가 되어도 목숨을 빼앗기지는 않는다는 '편안한' 사회에서만 '자기 이익의 추구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삶의 방식을 허용받을 수 있다.

  그 이외의 모든 경우에는 노력의 성과를 점유해서는 안 되고, 늘 타자와 더불어 나누지 않으면 안 되는 '무인도의 룰'이 적용된다. 현대 일본처럼 안전하고 풍요로운 시대에도 친족의 구성, 커뮤니케이션, 교환처럼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본질적인 활동에서는 의연하게 인류학적 타성이 작용하기 때문에 '무인도의 룰'이 적용된다.

  자기 이익의 추구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온실 속의 룰'을 통해 성장한 아이들이 이익을 모두가 나누어갖고 위기는 모두 분담한다는 '무인도의 룰'이 적용되는 장소에 내던져질 때 무엇보다도 '일을 잘할 수 없다'는 현상에 당황하고 만다. 젊은이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보람'이라는 말도 '온실 속에서 성장'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그들은 '보람이 있는 일'을 찾아 이리저리 직장을 옮기곤 한다.

  이때 그들은 '보람이 있는 일'이라는 말을 '수험 공부와 비슷한 일' 쯤으로 생각한다. 한마디로 스스로 선택한 일을 통해 자기가 노력한 성과가 객관적 평가를 얻어 정해진 시간에 다름 아닌 자기 눈앞에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일은 그런 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보람'을 찾는 젊은이들이 결국 찾아내는 '보람 있는 일'이란 뮤지션이나 아티스트, 작가 같은 '자영업 크리에이터' 계열로 국한되고 만다.

  확실히 로큰롤 가수가 천만 인, 개그맨이 천만 인, 만화가가 천만 인인 사회가 되는 것도 신명나고 활기차겠지만, 사회적인 요구도 좀 생각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특히 '자신의 일'과 '타인의 일' 사이에 경계선을 확실히 그었으면(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정하게 성과를 평가할 수 없으니까) 하는 요청은 불가피하게 그들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킬 따름이다. 본인들은 그 점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원래 '자신의 일'과 '타인의 일' 사이에는 경계선이 없다. 경계선을 억지로 그으려고 하면 일을 분할segment하고 단위module화할 수밖에 없다.

  '확실히 내 일을 다른 사람 일로 착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식별 가능한 일이란, 그 일 자체가 지극히 균질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그때까지 나란히 서서 함께 '경단'을 만들던 것을 멈추고, "오늘부터 나는 떡만 빚을 테니까 너는 팥고물만 만들어"라는 식이 되면, 분명 '떡'의 생산고와 품질은 '나'의 성과로서 명확하게 외형으로 드러난다. '떡은 맛있지만 팥고물은 좀 맛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도 전혀 개의치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그 대가로 '평생 떡만 계속 빚는' 주박에 걸리게 된다.

  공동 작업으로 어수선하게 진행하던 작업을 분담하여 경계선을 확실히 긋고 단위화하면, 당연히 그 일은 '단순노동의 반복'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파견회사의 일은 언제나 교체 가능하도록 완벽하게 단위화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과 평가는 어떻든 객관적이 된다. A군은 동일한 단위의 일을 일주일에 끝낸다. B군은 2주일이 걸렸다. 그러면 A군과 B군의 단위 시간으로는 두 배의 보수를 받을 수 있다.

  공평한 평가 기준이다.

  하지만 공정한 평가 기준을 위해 '계량 가능'하도록 한 대가로서 그들의 일은 필연적으로 '균질'해지는 동시에 무한하게 빡빡해진다. 이런 이치대로 나간다면 A군이 일주일 걸린 단위의 일을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하루에 끝내버릴 때 단위 시간당 보수는 더욱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적정하게 성과를 평가받는 일을 찾는 젊은이들은 최종적으로 '오른쪽 물건을 왼쪽으로 옮기는 속도'를 경쟁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 매달리게 된다.

  바로 오늘날의 현실이 그러하다. 일의 단위화 때문에 1990년대 '아웃소싱'과 '비정규직 고용으로의 전환'은 비용을 삭감할 비책으로 왕성하게 퍼져나갔다.

  이러한 변화는 '내 일'과 '옆사람의 일'이 확실하게 분리되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100% 책임을 지는 대신 그 성과와 손실도 자신이 책임지는 '자립형stand alone'의 노동환경을 원하는 구직자들의 마인드와 꼭 맞아떨어졌다. 본인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가은데, 구직자가 '보람이 있는 일'로서 '단위화된 일'을 찾을수록, 그들을 부리는 임금은 저렴해진다. 고용자들은 이런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성과급으로의 전환'이나 '독립 사업부 체제'를 찾는 젊은이는 지금도 많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 일을 타자로부터 분리시키고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는 독립적 노동 영역을 확립하면 '일할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대가로 같은 입장에 놓인 노동자와 연대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노동조건이 악화되며 노동의 동기 자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이 손에 넣는 것은 사실 '과로사할 자유'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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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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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2014.11.09 01:48

 

 

 

 

유명하지만 의외로 모르는 사람도 꽤나 있는 이야기이다.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

 

 

"기쁜 소식이 있다. 독일은 한 해 평균 80만 명이 일하다 다치는데, 한국은 고작 그 10분의 1도 되지 않는 8만 명이 다친다는 소식이다. 우리가 '선진국이긴 선진국'이라 좋아하려는데, 좀 찜찜하다. 안타깝게도 다른 말을 하는 통계수치가 있다. OECD 국가 중 한국 산재사망률 1위.

 

이 상이한 수치는 한국 산업재해의 재미있는 현상 중 하나이다. 한국의 산업재해율은 소위 선진국이라 일컫는 국가들보다 낮다. 한 예로, 2009년 미국의 전체 노동자 중 2.5%가 일하다 다친 반면, 한국은 고작 0.7%의 산재율을 보였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천 명이 일해 2-3명이 다치는 동안, 한국에서는 1명이 다칠까 말까라는 이야기이다. 산업공동화 현상으로 제조업이 거의 사라진 미국이 우리에 비해 2배 이상의 산재율을 보인다.

 

여기까지라면, 아 우리나라 좋은 나라 안전한 일터구나, 하고 말겠는데 문제는 사망률이다. 업무에 관한 사망 수를 표시한 산재사망률은 한국이 타 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높다. 미국이 10만 명당 4명의 사망률을 보인 그 해, 한국은 21명의 노동자가 죽었다.

 

산재율과 사망율의 과도한 격차는, 한국 노동자들은 '덜 다치지만 많이 죽는다'는 결론을 낸다." (p176)

 

 

산재율은 낮은데 산재 사망율은 높다. 이 나라의 노동자들은 좀처럼 다치지 않지만 한 번 다치면 쉽게 죽음에 이른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심심풀이 지능개발 책의 예제 같기도 한 이 이야기. 그러나 지금의 한국에서 남의 돈 받고 일하며 사는 사람들은 이미 해답을 잘 알고 있거나 아니면 삽시간에 추론해 낼 수 있다. 한 스웨덴 교수는 스웨덴의 산재 사망율을 묻는 한국 사람에게 의아해 하며 '아니 왜 사람이 일을 하다가 죽습니까?' 라고 반문했다 한다. 그런 반문을 하는 교수가 세상에 있다는 것이 의아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에겐, 위의 수수께끼는 수수께끼로서의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

 

'노동자, 쓰러지다'라는 제목도, '르포, 한 해 2000명이 일하다 죽는 사회를 기록하다'라는 부제도, 수십 개의 철근이 꽂혀진 현장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주저앉아 있는 건설현장 노동자가 그려진 표지도,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다. 이 책은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의 노동 현장을 기록한 '빨갱이 책'이다. '업무 효율성'과 '생산성 제고', 따라서 나아가 '국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해졌던 조치와 그 영향들 가운데 굳이 '소수의' 악질적인 것들만을 파고 들어가 까발린 '불손-불순'한 책이다.

 

책은 총 7부에 걸쳐 각종의 현장을 소개한다. 조선소, 건설 현장, 철도, 우체국, 택배, 퀵서비스, 배달... 모두, 은 사람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사건이 못해도 한 건 씩은 연상되는 글자들이다.

  

내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테면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업한, 혹은 전문직을 가진 당신. 당신의 부자 부모가 당신의 전세, 혹은 자가 주택을 사주고도 여전히 풍족한 노후를 누릴 수 있을까? 당신이 펀드로 주식으로 부동산으로 죽을둥살둥해서 돈을 모아놓았다 치자. 당신의 자녀가 당신 만큼의 학력을 갖고 그만한 재능을 갖고 그만한 성취를 이룰 수 있을까? 아니, 우리 집안은 모두 상관 없는 이야기이다, 라는 사람이 있다 치자. 당신이 다니는 회사, 당신이 맡는 사건, 당신이 보는 환자가 점점 이렇게 '쓰러져' 간다. 그 때가 되면 누구한테 무엇을 팔아서 살 작정인가. 그러니까, 여기에 '내 얘기가 아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러 종의 신문을 매일매일 비교적 열심히 읽는 편인 나는, 자세한 수치는 익숙하지 않아도,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현장 분위기나 특정 사건 중 모르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개별의 기사로만 접하던 것을, 각종 노동 현장의 이야기를 모두 묶어놓은 결과물로 읽어보니, 그것도 짧은 기사가 아니라 한 필자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꾸려진 르포의 형태로 접해보니, 익숙하기 짝이 없는 '미친 나라'라는 단어에 실제로 무게가 있었음을 새삼 잠시나마 느낀다. 내일도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오래 느낄 틈은 없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나는 이 책을 고등학생들에게 반드시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의 삶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노동'의 가치가 이 나라에서 얼마나 치졸한 동기와 비열한 방식으로 더럽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 내용에 의문을 갖고 개선을 고민해야 한다. 정의감이나 시민 의식과 같은 고상한 차원에서가 아니라, 식탁에다 밥과 국을 차려놓고 앉아서 먹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을 때 결혼하기 위해서, 새끼들의 자는 모습만 보며 키우지 않기 위해서, 영문도 모르고 죽거나 그렇게 죽고도 돈 한 푼 못 받지 않기 위해서. 딱 그 차원에서.

 

이번 책에서는 그야말로 '쓰러진' 노동자들을 주로 다루어주었다. 다음 책에서는 쓰러지고 있는, 그리고 반드시쓰러질 현장들도 가 보아주었으면 한다. 더 많이, 더 자세하게. 비극적인 말이지만, 몇 권의 시리즈를 내도 소재는 한동안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작가는 사회문제 관련 서적 란에서 지속적으로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지치지 말고 계속해주길 부탁한다.

 

줄줄이 쓰고 있을 생각 없다. 이 책을 대여해서 읽고 있던 열흘여의 기간만 살펴봐도 된다. 그 동안 있었던 일 몇 개만 소개하고 독후감을 마무리 지으련다.

 

그 열흘 동안. 현대중공업에서는 올해 일곱번째로 사내하청 노동자가 죽었다. 이 회사의 올해 산재 은폐 건수는 11월 초 현재 '밝혀진 것만' 39건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국감에서, 건설현장의 안전 문제를 고용노동부에 제보한 노동자가 제보전화를 끊은지 두 시 반만에 팀장에게 불려가 해고당한 사례가 공개됐다. 거창한 용어로 보이는 '안전 문제'가 무엇이었느냐 하면, 설 현장에서 안전화와 마스크를 안 준다는 것이었다. 고용노동부는 내부 제보자의 실명을 기업에 알려줬느냐는 의문에 '(담당자에게)물어봤는데 그런 일 없다고 한다'고 답변하고 이 사건을 끝냈다.

 

그리고 엊그제인 11월 6일,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정규직 노동자로 판결을 받은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노동자가 자살을 시도했다. 그 좋다는 정규직이 됐는데 왜 죽으려고 했을까. 정규직이 되겠다고 일으켰던 파업 때문에 현대차에 손해를 끼쳤다고 울산지법에서 위 노동자를 포함한 조합원 122명에게 손해배상 70억을 때기 때문이다.

 

더 쓰라면 백 줄이고 천 줄이고 얼마든지 더 쓸 수 있다. 각별히 똑똑해서도 글재주가 뛰어나서도 아니다. 그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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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혹시나 팩트가 틀렸다고 우국청년들에게 지적당할까봐 미리 적어둔다. 상기 인용부에서 OEDC국가 가운데 산업재해 사망율 1위라는 수치는 2010년 기준이다. 우리나라는 2013년 현재 멕시코, 터키에 이어 3위에 올라있다. 많이 안전해졌다.

    2014.11.09 01:5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비밀댓글입니다

    2014.11.11 08:26 [ ADDR : EDIT/ DEL : REPLY ]
    • 실제로 읽으면 엄청 슬프다. 필자의 담담한 어투 탓에 더욱 그렇다.

      2014.11.12 04:08 신고 [ ADDR : EDIT/ DEL ]
  3. 비밀댓글입니다

    2015.09.20 04:04 [ ADDR : EDIT/ DEL : REPLY ]
    • 그 때가 뭐든지 재미있지? 그래도 몇 시간 동안이나 재미있게 읽어 주었다니 기쁘다.

      2015.09.21 22:01 신고 [ ADDR : EDIT/ DEL ]

독서일지2014.11.09 00:16

 

 

 

인천과 관련이 있는 하나의 소재를 정해 인천의 문화를 들여다 보고 크게는 인천이란 지역의 공간적 특수성을 고찰해 보는 '문화의 길' 시리즈. 그 8권이다. 이 카테고리에는 시리즈의 7권으로 인천의 야구사를 정리해 놓은 <삶의 여백 혹은 심장, 야구>를 소개한 바 있었다.

 

 

책은 총 4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 '인천, 근대와 영화의 시발점'에서는 개항부터 2014년 현재까지 인천의 영화사를 개괄한다. 약 5, 60쪽의 분량인 만큼 인물과 사건을 모두 소개하지는 못하고 개항기, 일제 시대, 산업화 시대, 그리고 현재의 순으로 시대를 뚝뚝 끊어 해당 시기의 주요한 영화 공간과 몇 가지 사건을 소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부 '인천은 항구다'와 3부 '섬의 도시 인천'은 한국 영화가 인천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챕터이다. 전국의 광역시 중 인구 수로는 부산에 이어 두 번째이고 간척과 합병 등을 통해 행정 구역 또한 계속해서 팽창 중이지만 뭐라고 하더라도 영화 속에서의 인천은 항구와 섬이다. 객관적으로 드러나 있는 결과가 그렇다. 인천 사람에게 인천을 설명하라고 하면 항구나 섬을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어쨌든 서울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서울 사람들이 보는 인천은 항구와 섬이다. 그것도, 부산까지 가려면 돈이 드는데 마침 가까운 곳에 있어줘서 고마운 정도의 항구와 섬이다.

 

 

4부 '인천의 속살을 담은 영화, 영화인들'에서는 제목 그대로 인천 출신의 영화인이 찍은 영화나 혹은 인천의 지리적 명소가 등장하는 영화를 직접 소개하고 있다. 언급되는 영화는 <고양이를 부탁해>와 <파업 전야>, <북경반점>, <수퍼스타 감사용>, <비상>, 그리고 임순례 감독의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 장에서는 영화를 통해 '인천의 정체성'을 보여주겠다는 기획 의도가 다소간 흐릿해지는 부분들이 있어서 좀 아쉽다. 

 

이를테면 <파업 전야>나 <북경 반점>은 분명 남동 공단과 동인천 차이나 타운이라는 인천의 구체적 공간에서 출발한 영화들이다. 그러나 해당 영화의 주요한 메시지가 부조리한 노동의 해악을 폭로하고 노동자의 연대 의식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사람의 감성을 위로하는 음식 영화로서의 매력이라는 필자의 분석은 그 영화가 갖는 유한 특성에 대한 설명을 될 수 있어도 왜 이 영화가 인천에서 찍혀야 했는지, 이 영화에는 인천의 무엇이 녹아 있는지에 대한 답은 될 수 없다.

 

<수퍼스타 감사용>과 <비상>의 경우에도 필자는 역경을 딛고 승리를 거두는 스포츠 영화의 장르적 매력을 설명하는 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삼미슈퍼스타즈와 인천 유나이티드의 실화에는 거기에서 더 '극적인' 장면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 그러니까 이런 영화를 찍고자 했을 때엔 반드시 인천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지역민들의 유난히 낮은 애향심, 최근까지 대단히 열악했던 스포츠 시설, 스폰서가 되어줄만한 대기업의 부재, 그리고 지자체의 무관심 등, 인천의 스포츠 환경에는 일이 안 되기 쉬운 구조적 요소들이 널려 있었다. 드라마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 정도까지는 충분히 가 닿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따른다.

 

임순례 감독의 작품군을 분석하는 글의 도입부에서는 '그의 영화에는 인천의 느낌이 있'는데, 그것은 '주변부 인생의 고군분투기'를 '사람 냄새가 나'게 그리는 것이다, 라는 짧은 분석이 있긴 하다. 하지만 필자는 그것이 왜 인천의 느낌이고 이 느낌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이며 영화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는지 등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 없이 '주변부 인생'이라는 키워드로 임순례의 영화들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분석의 과정에서 종종 언급되는 것은 이 '주변부'를 만들어낸 것이 사회의 구조라는 지적인데, 이는 분명 일정하게 유효한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왜 그 영화를 '인천 영화'로 분류했는지에 대한 답은 되지 못한다.

 

이런 갈증을 해소해주는 것은 <고양이를 부탁해>에 관한 분석 글이다. 이 영화의 내용 자체가 애당초 인천 출신여학생들이 성장하며 겪는 구체적 고민들을 다루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서 서울 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오는 것에 대해 '인천의 지역적 특성은 결국 서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지적은 학술적일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진실에 대단히 가까운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깊이에 있어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영화라는 흥미로운 소재로 내 고향 인천을 다시 본다는 재미는 분명히 있었다. 독서를 마친 뒤에도 달뜬 열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외부인, 특히 '서울 사람'의 인천에 대한 시선과 인천 사람이 인천을 보는 시선 간의 간극에 대해 한참동안 생각에 빠져있었던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단, 지난 번 <삶의 여백 혹은 심장, 야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야구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아니면 인천 사람을 제하고 나면 누구에게 선뜻 권할만한 책인가 생각해보면 꺼려지는 데가 있다. 개인적인 의미와 재미를 위해서라도 이 시리즈는 계속 읽어나갈 생각인데 그 자취를 남겨두는 정도의 의미는 있겠지 싶어 독후감을 써둔다.

 

 

 

 

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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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2014.10.10 15:21

 

 

좌절과 슬픔이 되었든 위안과 희열이 되었든 내 삶에 가장 많고 깊은 생각과 감정을 가져다준 단일한 사물은 역시 책이다. 어렸을 때 즐겨 하던 어떤 일들은 때로 내 취향이 변하여서 그치기도 하고 때로 그것이 생업의 일부가 되어서 더이상 즐기지 못해 그치기도 하지만, 읽고 쓰는 일만은 즐겁기를 멈추는 일이 없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본가의 널찍한 책장에 도토리가 다람쥐 모으듯 책을 사서 꽂아넣는 것이 또 하나의 비밀한 취미였다. 어느 정도의 양이 모여서 마침내 카테고리 하에 재배치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우쭐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십 년이 지나도록 그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언제 군대에 끌려갈지도 모르거니와 타향의 월세살이에는 마음이 흡족할 만큼의 책을, 살 돈도 놓아둘 곳도 지고 이사할 요량도 없었던 탓이다. 장서의 양이나 이용 편의성이 그래도 좀 나은 편이라는 모교의 도서관을 내 도서관이라고 생각하며 자위하고 지냈다.

 

사단은 한 온라인 서점의 오프라인 중고책방 때문이었다.

 

중고책방은 예전에도 타향 생활에 지치면 홀로 찾아 마음을 위로하던 곳이었다. 십여 년째 거주하고 있는 신촌 인근에는 서울 지역에 이름난 중고책방이 적어도 세 군데는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골목골목을 돌아 점집 옆에 있는 한 책방을 무척 좋아했는데, 들어가는 이를 맞아들이는 매큼한 곰팡이 냄새, 밖에서는 분명 점잖은 사람들이겠지만 바로 여기 헌책 앞에서는 탐욕스러운 눈을 감추지 못하는 서벽書癖들, 그리고 단순히 오래되었을 뿐인 심상한 책들 사이로 보석처럼 숨어 있는 양서들 등 이런저런 즐거움이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2000년대 후반에, 유명 온라인 서점 중 하나가 오프라인 중고책방을 개설했다. 신촌에는 이미 일본의 최대 중고 책방 브랜드가 들어와서 죽을 쑤고 있는 판이었다. 중고책방이라면 으레 앞서 말했던 즐거움들이 만족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나는, 대규모 중고서점이라니, 애서가와 장서가들의 취향을 전혀 모르는구만, 하고 짐짓 혀를 찼던 것이다.

 

그리고 5, 6년 여가 지난 지금, 나는 전화세와 카드값이라도 이렇게 달마다 열심히 꼬박꼬박 갖다 바친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중고서점의 노예가 됐다. 주요 동선마다 매장이 있는 것도 한몫 했지만 이전의 헌책방 같으면 몇차례고 방문해야 하나쯤 건질까 말까 하던 내 관심 서적들이 아주 깨끗한 상태로 주루룩 늘어서 있고 편리하게 검색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책값은 차츰 올라 이제 300쪽 짜리 신간 세 권을 집어들면 오만 원 한 장이 지갑에서 뎅강 잘려나갔는데, 같은 돈으로 이곳을 찾으면 못해도 열 권은 넉넉히 집어들 수 있었다. 나는 돈이 없고 보관할 곳이 없어 학교 도서관에서만 몇 차례고 읽었던 예전의 신 포도들을 복수하듯이 사 모았다.

 

그래서 사단이 난 것이다. 고시원이나 목욕탕을 전전하던 이전에 비하면 그래도 큰 창 달린 방 하나 마련하고 사람 사는 꼴은 최소한 갖추었다지만, 집 한 채도 아니고 방 한 칸이 감당할 수 있는 책의 양이란 뻔하다. 책장 두 개 분량의 책을 고향 본가의 내 방으로 보내고 나서도 방에는 책이 대책 없이 쌓였다. 책이 무릎 높이 이상 쌓이기 시작하면 아래쪽의 책은 빼내기가 귀찮아 손에서 멀어진다. 읽지 않고 그저 갖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싫어 나는 높지 않은 책더미를 방의 이곳저곳에 제주의 오름처럼 만들어두었던 것인데, 통행을 방해하는 것을 넘어 마침내 책을 밟지 않고서는 한걸음도 떼놓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눈을 딱 감고, 나는 침대의 머리맡에 책들을 쌓아올렸다. 평상시에 가장 이용하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침대의 폭에 맞추니 네 줄이 올라갔다. 다 쌓고 나니 키보다 조금 모자랐는데, 그마저도 그 사이 주문해 놓았던 책들이 새로 오자 키와 맞춰졌다. 그렇게 정리한지 두어달이 지난 지금은 머리 위쪽 말고 옆쪽으로도 새 줄이 생겨 책탑은 ㄱ 자 모양이 되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서 태어났고 잠버릇이 고운 편이라 저지를 수 있었던 무식한 짓인 셈이다. 지금 내 삶에서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사인死因은 자다가 책에 깔려 죽는 것이다.

 

이렇게 우는소리 하는 나도 갖고 있는 책을 다 세어보면 삼천 권을 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나는 못해도 만 권 이상의 책을 갖고 있는 장서가, 혹은 서치書痴들을 몇 명이나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지금 내가 가진 고충과 즐거움을 나누는 기쁨을 갖고 또 아직 겪지 못한 새로운 어려움들을 들으며 가벼운 좌절과 무모한 흥분을 느낀다. 모두, 이 작고 네모난 종이뭉치에 혼을 빼앗긴 자들이라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높고높은 책무덤에 한 권 더 추가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책, 오카자키 다케시岡崎武志의 <장서의 괴로움>이다.

 

 

 

 

 

 

 

다케시武志라는 이름만 놓고 보면 실제로 있는 것 중에서는 책과 가장 거리가 먼 것만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저자는, 실은 '대략 2만 권', '잘못하면 3만 권'의 책을 지닌 장서가이며, 책과 헌책에 대한 글을 쓰고 강연을 해 그 돈으로 또 책을 사는, 그야말로 책의 노예 중 상노예이다. 그런 그가 이름난 장서가들의 에피소드, 헌책의 매입 노하우, 관리의 괴로움, 그리고 장서의 철학 등에 이르기까지, 아무튼 장서가나 장서가 지망생이라면 환장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을 일본 작가 특유의 유쾌하고 귀여운 문체로 촘촘이 엮었다.

 

독후감을 다 쓰고 나면 항상 이 책은 어떤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간 독후감을 써온 작품들 중에 추천할 이들이 가장 명확하고 또 좁은 책이다. 장서가가 아닌 독자가 읽는다면 이 책의 내용은 허황되거나 혹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일 테다. 어떤 이는 그 탐욕과 무모함에 짜증이 날지도 모르겠다. 책을 보관하는 괴로움에 대한 책을 보관하다니. 그래서 이 책은 오롯하게 만권루萬券樓나 오거서五車書 따위의 그럴듯한 이름을 앞세워 고대로부터 암약해 온 자들만을 위한 책이다. 냉난방비는 생각도 않고 1층부터 3층까지를 꿰뚫는 책장이 있는 집을 지을 꿈만을 꾸는 자들만을 위한 책이다. '책 훔친 만용담'이 있을까 조마조마하며 읽었다는 장정일의 추천사부터 시작해, '(이 책을 쓰면서) 책이 너무 늘어 걱정이란 투정은 결국 자랑삼아 자기 연애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되었다는 저자 후기까지, '책빠'의 마음을 이토록 후벼파고 위로하는 팬북이 다시 있을 수 있을까. 끌린다면 두 권 사자. 이미 산 줄 모르고 다시 사는 것 또한 장가의 미덕이므로.

 

 

 

 

 

 

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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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겨우 일천 권 가량을 갖고있는데 삼천 권이라니 굉장히 많이 갖고 계시네요

    보통 어느 분야에 주를 두나요?

    2014.10.16 01:5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저는 사회 공부에 뒤늦게 재미를 붙여서, 최근 몇 년 간은 사회과학 분야의 도서들을 주로 읽고 있습니다. 블로그에 올리신 책장 사진은 가지런한 모습에 보기만 해도 속이 다 시원하네요.

      2014.10.16 23:42 신고 [ ADDR : EDIT/ D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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