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12

생일빵

 

 

<텔루구 문자>

 

 

 

 

10월 1일부터 4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 2차 세계문자올림픽에서 한국의 한글이 지난 2009년에 이어 두

 

번째 금메달을 수상하였다. 2위는 인도의 텔루구 문자, 3위는 알파벳이 차지하였다. 경쟁은 각국의 학자들이 30

 

분간 자국 고유문자의 우수성에 대해 발표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는데, 미국, 인도, 수단, 스리랑카, 태국, 포르투

 

갈, 이 여섯 나라의 심사위원들이 문자의 기원과 구조·유형, 글자 수, 글자의 결합능력, 독립성 등의 기준을 통해

 

해당 문자의 우수성을 평가하였다고 한다. 마침 한글날 즈음에 전해진 이 소식에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는 환호

 

의 목소리와 함께 현재 국경일인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눈여겨 볼만한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올림픽의 주관 기관인 '세계문자학회'의 학회장

 

및 임원이 모두 한국인이라는 점, 학회 홈페이지의 공식 발표문에서는 3위가 문자인 '알파벳'이 아니라 언어인

 

'영어'로 발표되는 점 등 전문적인 식견이 부족해 보인다는 점 등이었다.

 

 

 

나 또한 흥미가 생겨 추가적으로 검색을 해 보았는데, 수상쩍은 부분을 몇 군데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간단한 사실부터. 네이버와 위키피디아의 검색으로 알아본 바, 참가국 가운데 스페인, 독일, 남아공, 아이

 

슬랜드의 언어는 각기 다르지만, 문자는 '로마자'로 동일하였다.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국가들이 문자올림픽에

 

따로 참가해도 되는 것일까? 이건 내가 문자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기도 하고, 월드컵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

 

드가 따로 참가하는 예도 있고 하니 그렇다 치고 넘어가 보기로 했다.

 

 

 

두번째. 학회장인 배순직 씨. 세계문자학회의 공문 등에서는 문학박사로 소개되고 있으나 실제로의 사회 활동은

 

대부분 목사로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후원회의 회장과 기사 등에 소개된 회원들 또한 그의 인맥인 대형교회

 

목사들이었다.

 

목사라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지난 1회 대회에서 한글이 금메달을 수상하고 난

 

뒤 '한글이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밝혀짐으로써, 세계 선교에도 새로운 방향이 제시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라는 말을 했고, 후원회의 회장인 김창연 목사는 '이번 문자 올림픽을 계기로 앞으로 전 세계에 12만 개

 

의 한글학교를 세우는 데에 전 기독교인이 십시일반으로 후원에 동참해 주'기를 요청하는 한편 '기독교인들이 1

 

만원씩 후원을 하면, 외국인 한 사람에게 한글을 가르칠 수 있다'는, 더욱 수상쩍은 말을 남겼다.

 

 

 

세번째. 대부분의 기사에서 '이양하'로 기재된 이영하 집행위원장이 이번 올림픽이 열리기 한 달 전인 9월 초에

 

남긴 글. 그는 이 글에서 '제 1차 대회에서 한글이 세계 1위로 평가 되었고 이번 방콕 2차 대회에서 한글이 다시

 

세계 1위 글자라는 "방콕선언문"을 발표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언급을 하였다. 대회가 열리기 전 한국이 이미 금

 

메달 수상국으로 결정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세번째에서 이어지는 네번째 의혹. 대부분의 기사에서는 생략된, 연합뉴스 기사의 마지막 부분. 대회가 끝난 뒤,

 

'참가한 각국의 학자들은 대회 마지막 날 ‘방콕 선언문’을 발표하고 자국 대학에 한국어 전문학과와 한국어 단기

 

반 등을 설치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사전의 합의 없이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예를 들어, 이 대회에서 스페인

 

로마자가 금메달을 탔다면 참가국들은 모두 서반어학과를 증설하였을까? 한국의 한 학회가 주최한 대회에서

 

한국이 2회 우승하고 참가국들은 대회가 끝나는 바로 그 날 한국어 학과를 설치하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은, 아

 

주 많은 우연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추가로, 학회에 참가한 인원은 아마도 학자, 즉 교

 

수들일텐데, 이들이 새 수업도 아니고 새 학과를 창설할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일까?

 

 

 

마지막. 이영하 집행위원장은 대회를 마치며 '문자는 언어와 달리 쉽게 변하지 않는데다 이번 대회에 창조, 개조

 

문자까지 참가한 만큼 사실상 문자올림픽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굳이 두 번씩이

 

나 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울러, 진심으로 한글이 세계의 문자들과 당당하게 경쟁하여 그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

 

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세계의 모든 문자들이 참가하는 그 날까지 대회를 계속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모든 문자들이 참가한 뒤라 하더라도 끊임없는 경쟁을 통해 지속적으로 한글을 홍보하는 것이 그들이 공표한 목

 

적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한글이 효율적인 기능과 아름다운 디자인을 겸비한 문자라는 데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독서가

 

취미이고 공부가 직업인 나는 그런 한글의 가장 큰 수혜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굳이 이런

 

수상쩍은 방식을 통해서까지 세계에 알려야만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2009년, 한국이 아닌 국가 중에서 세계

 

최초로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한 것으로 알려졌던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 족. 한국 정부는 그간 인도네시아

 

정부가 찌아찌아 족의 한글 사용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고 지속적으로 발표해 왔지만, 실제로는 단 한 차례도

 

공식 문자로 지정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작년에 이미 밝혀진 바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로마자 외의 다른 문자

 

를 채택하는 것은 실정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 정부가 행해 온 것은 한글 교육에 대한 간접적 지원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유일한 한국어 교육기관이었던 '세종학당'도 정부의 지원 없이 7개월 정도를 버티다가 철수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지원 없이 '애국심'을 앞세워 한글을 정권 홍보의 수단 따위로 전용한

 

이 사례에서, 국제 사기와 주가 조작을 '자원 외교'로 포장하거나, 집회 시위의 폭력적 진압을 '법치주의 수호'라

 

표현하였던 이 정권의 단면들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상상력의 소산일까.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서로 축하하고 기뻐하고 있는 한 때에 중뿔난 소리를 하는 것은 역시 껄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한글이 올 해 생일빵 한 번 제대로 돌려 맞았다고 생각한다.

 

 

 

 

 

 

'일기장 > 20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붉은 돼지>, Savoia S.21  (1) 2012.11.08
중학생은 보지 마라  (2) 2012.10.16
메일 정리를 하다가  (0) 2012.10.06
LEGO 21016 숭례문  (1) 2012.09.25
두 번째 반디&view 어워드  (0) 2012.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