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국회 교과위 국정감사에서 민주통합당 김태년 의원에 의해, 국사편찬위가 천재교육에서 펴낸 역사교
과서의 87년 6월 항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한열 씨의 사진을 수정하도록 권고한 사실이 밝혀졌다. 국사편찬
위원회는 권고의 사유가 "학습자가 중학생임을 고려해 직접적이고 참혹한 사진 제시에 대해 재고려"를 요망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수정을 '권고'하였을 뿐이라면 강제력이 없다는 점에서 그닥 큰 쟁점으로 보이지 않지만, 김
태년 의원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검정교과서로 채택돼야만 공신력 있는 교과서 업체로 인정받을 수 있
고, 참고서 시장에서도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명목적으로는 권고이지만, 사실상 수정지시로 받
아들여진다.' 이 사진은 결국 명동성당의 사진으로 교체되었다.
'YONSEI'라는 글씨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저 청년은 87년 6월 9일 당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이다. 66년 생으로 나이는 스물두 살, 생일이 지나지 않아 만으로는 스무 살이었다. 스물두
살인데 2학년인 이유는 재수를 했기 때문이다. 종로학원에서 수학했다 한다.
저 청년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이유는 머리에 최루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살수차로 최루액을 뿌
리거나 하지만 당시에는 유탄발사기처럼 총에 넣어 발사하는 최루탄이 있었다. SY-44라고 한다. 사각 45도로
발사하면, 즉 45도의 각도로 하늘을 향해 쏘면 70m까지 날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 최루탄을 수평으로 발사한
경찰이 있었고, 그 최루탄에 이한열이 맞은 것이다.
최루탄이 날아다닌 것은 연세대의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6월 10일에 전국적인 큰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 전에 연세대 학생들이 미리 모여 일종의 궐기대회를 열었던 셈이다. 6.10 항쟁이
라고도 하고 6월 항쟁이라고 통칭하기도 하는 이 큰 시위의 당시 공식 명칭은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
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였다. 말하자면 이한열은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과 '호헌철폐'를 주장하기
위해 시위를 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박종철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의 학생이자 학생회장이었다. 그는 이한열이 죽던 87년의 1월, 용산의 남영동 대
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죽었다. 잡혀간 이유는 같은 과의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중이던 박종운의 거취를 밝혀내기 위함이었다. '민주화추진위원회', 약칭 '민추위'는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비
공개 지도조직으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행하는 한편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활동을 펼쳤다. 전두환 정권은
이 민추위에 관련된 조사를 남영동의 대공분실에 일임하였는데, 여기에서 박종철을 잡아들인 것이다. (민추위의
위원장이었던 문용식은 현재 민주통합당의 대선후보인 문재인의 캠프 대변인이고, 관련인사였던 김근태 전 의
장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작년에 별세하였다. 박종운 씨는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이 소속되어 있었던 민
주정의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에 입당, 2000년과 2004년에 두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박종철은 87년 1월 13일 밤에 잡혀서 1월 14일 밤에 죽었다. 경찰은 14일 밤 시체를 서둘러 화장하려고 하였으
나 당시 부장 검사는 사체보존 명령을 내렸고, 1월 15일 행해진 부검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의 흔적이 발견되었
다. 고문의 흔적이 발표되기 전, 치안 본부장 강민창은 '조사를 하다가 (책상을) 탁 하고 치니 (박종철이) 억 하
고 쓰러졌다'며 박종철의 사인이 쇼크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며칠 뒤 직접적인 사인이 고문이었음이 밝혀지
자, 정부는 물고문만이 있었을 뿐이며 조사를 담당하였던 두 형사의 소행이라고 결론짓고 박종철의 사체를 화장
하였다. 같은 해 5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에 의해 전기고문의 사실과 함께 치안본부의 차장급 인사를
포함해 다섯 명이 관련되어 있었으며 죄를 뒤집어쓴 두 명에게 금전적인 보상이 있었음이 추가로 밝혀졌다. 이
한열이 죽기 한 달 전의 일이다.
'호헌철폐'는 '호헌'을 '철폐'시키자는 말이다. '호헌(護憲)'은 헌법(憲法)을 보호하고 유지하겠다는 것으로, 개
헌(改憲)의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호헌은 특히 같은 해인 87년 4월에 있었던 전두환 당시 대통
령의 '4.13 호헌조치'를 지칭한다. 헌법에는 여러 조항이 있지만, 87년의 쟁점들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대통령
선출 방식과 임기에 관한 조항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격된 뒤 최규하가 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지만 다음 해인 80년 8월 사
임한다. 79년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장군이 이미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0년 8월 27
일, 유신 헌법에 의거, 국민 가운데 선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2540명 가운데 2525명이 서울 장충체육관에
출석하여 간접선거 방식으로 11대 대통령 선거를 치룬다. 후보는 전두환 단독 출마, 총 2525표 가운데 찬성 25
24표, 무효 1표였다.
1980년 11월, 전두환 정권은 개헌을 단행한다. 종래의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 선거
를 통해 당선되며 임기 6년에 종신 집권이 가능했다. 새 헌법은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라는 점은 동
일했지만 임기 7년에 단임제였다. 이 헌법에 의거, 전두환은 81년 치뤄진 12대 대통령 선거에서 90%를 상회하
는 득표율로 당선된다.
왕정이나 다름없던 유신 헌법에 비춰보면야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지만, 형식만을 갖추었을 뿐 사실상 후계자
지명을 통해 지속적인 집권이 가능했으므로 대통령 선거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가 아니라 국민 모두에 의
한 직접선거로 전환하자는 것은 시민사회의 오랜 요구사항이었다. 그런데 임기 마지막 해인 87년의 4월, 전두환
정권이 이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호헌 조치'를 발표한 것이다. 누가 봐도 차기 집권자는 전두환의 육사 동기이자
쿠데타 세력인 노태우였고, 군정(軍政)은 종식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한열이 죽기 두 달 전의 일이다.
사인조차 은폐된 박종철의 억울한 죽음과 집권에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 군부 정권. 이에 대한 분노의 표출일로
6월 10일이 낙점되었다. 그 하루 전, 연세대에서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고 이한열은
여기에서 최루탄을 맞았다.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는 사진은 다음 날 아침 뉴욕타임스와 중앙일보 1면에 실렸고,
이 사진은 6월 항쟁의 전국적인 폭발에 동력원이 되었다. 보름여 간에 걸친 시위 끝에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
는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약속하는 개헌안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12월, 직선제에 의한 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뤄졌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인 두 축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따로
이 출마하여 각기 28%, 27%의 득표율을 얻음으로써 득표율 36.6%의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고 군
인의 통치는 5년 연장되었다. 이한열은 이 해 7월에 죽었다.
연세대학교를 찾아본 사람이라면 교문에서부터 삼거리까지 길게 뻗은 길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백양목이 많 았다 하여 백양로라 불리우는 이 길을 통해 이한열은 세브란스로 옮겨졌고 거기에서 죽었다. 기록을 살펴보니 그는 지금도 있는 '만화사랑'이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한다. 만화를 읽고 그림을 그리러 오다니던 그 길을, 이 날 그는 '열사'가 되어 죽으러 지났다. 교과서의 학습자인 중학생에게 그의 죽음이 더 참혹한 것인지 사진이 더 참혹한 것인지, 나는 무서워 말하지 못하겠다. 연세대 앞을 찾은 이한열의 조문객들 앞에 버티고 선 그들의 모습이 다만 오래 전 그 날의 흑백사진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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