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다녀와서 히터의 전원 버튼을 눌러보니,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되던 것이 피식피식 소리를 내더니
만 더운 바람은 안 나오고 부품 타는 냄새만 새어나온다. 뒤집었다가 눌러보고 몇 차례 걷어차고 눌러봐도, 계속
작동시키다가는 큰 불 날 것 같은 느낌만 강해질 뿐 나아지는 기색은 전혀 없다.
그렇지 않아도 바꿀까 생각은 하던 차였다. 한 뼘 조금 넘는 작은 크기의 기계라 방 안의 공기를 다 덥히려면 한
참이 걸리기도 하고, 싸구려라 타이머 기능도 없어 자기 전에는 꼭 끄고 자야 하는 것이 성가셨던 것이다. 와중
소셜커머스에서 온 안내 메일에는 각종의 전열기들이 저렴한 가격에 올라와 있었다.
그래도 쉽사리 새 물건을 사지 못했던 것은 좁은 고시원에서부터 새벽의 연구실, 그리고 3년째 살고 있는 지금
의 월세방까지 여러 군데에서 몇 차례의 겨울을 함께 보냈던 정 때문이라 해도 좋다. 몸도 춥고 마음도 추운 귀
가길에, 반 평이 됐든 한 평이 됐든 내 돈 내고 빌린 내 방에 들어가 딸칵, 하고 히터의 버튼을 누르면 금세 따뜻
한 바람이 나와 심신을 달래 주던 것이 몇 차례였는지 셀 수도 없다. 관 같은 고시원 방에서 덥고 건조한 바람을
쉴 새 없이 쐬었던 그 일이년 새 피부는 엉망이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방 한 구석에 꼭 맞았던, 그리고 고작 만
원짜리 한 두 장의 가격으로 겨울을 날 수 있는 온기를 가져다 주었던 이 기계에 애정이 있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제 몫 잘 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이 더 크고 해서, 나는 당장 히터가 없게 된 불편함에 불퉁거리
거나 어디에 맡겨야 좋을지 대체 맡아주기는 할런지도 모를 수리를 고민하기보다는, 수고했다, 라고 생각하며
코드를 뽑아 몸통에 잘 감아주었다. 일단은 방의 빈 구석에 놓아두었는데 언제 어떻게 버려야 할지는 잘 모르
겠다.
오래 살자고 겨울 새벽에 냉수마찰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참에 옷 든든하게 껴입고 추운 날씨에 견디는 면역
력이라도 키워볼까 생각하다가, 외풍이 제 집 드나들 듯 하는 산아래 큰 창문 방에 사는 주제에 헛된 객기 아닐
까 싶기도 하고, 자정쯤 되니 손가락 끝이 굳어 뜻대로 키보드 자판을 칠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실내에서는 팬
티 한 장, 손님이 오시면 티셔츠 한 장 더라는 가문의 복식 예법에 어긋날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 이래
저래 해서 옛적 석유곤로를 떠올리게 하는 디자인의 새 히터 하나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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