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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9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연희동 쪽에 살게 되면서 요사이의 산책은 홍대를 향하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 많은 것이 정신 사나

와 정작 홍대 앞까지는 가지 않지만, 어정쩡한 위치 때문에 예전에는 쉬이 가지 못했던 홍대 인근의

헌책방들에 들르기도 하고, 신촌에서 몇 발짝 벗어난 곳에 인천의 한갓진 동네 같은 거리가 있어 신

기해 하며 걷기도 하고, 아무튼 즐겁다. 와중에 재미있는 곳을 발견했는데, 망한 가게에서 만화책과

비디오, DVD 등을 납품받아 상설로 판매하는, 일종의 중고 도매점이 그곳이다. 주로 구입하는 것은

만화책인데 당장에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도 한 주나 두 주 가량 기다리다 보면 어느샌가 권당 오백

원에서 천 원 사이의 가격으로 책꽂이에 꽃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한편으로는 컴퓨터로나 돌려

보던 만화책을 직접 손에 잡게 되어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에쿠, 어느 동네 형님이 또 한 번

말아 드셨구나 하고 씁쓸해 하기도 한다. 그래도, 사긴 산다.


새로 일을 시작하면서 소액의 돈이 입금되어, 이번에는 만화책보다는 값이 좀 나가는 DVD를 몇 장

집었다. 본 편만이 아니라 서플먼트까지 붙어 있는 버전의 '알 포인트'나 몇 번을 봐도 즐거운 '거

북이는 의외로 빨리 달린다'를 산 것도 크게 기뻤지만 가장 두근두근해 하며 산 것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였다.


나는 20대의 초반에 이 영화를 보고 크게 흐뭇하여서 이 곳에 관람의 후감을 적기까지 했었다. 뒤져

보니 2002년 9월 15일의 일기로, 약 7년 전의 일이다. 그 뒤로 채널을 돌리다가 잠깐 스쳐 지나가거

나 이따금 포스터를 꺼내어 보는 일은 있어도 딱히 일부러 다시 볼 일은 없었던 터라 이번이 7년만

의 관람이었는데, 다시 영화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자세한 설정 같은 것은 다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은행이라는 '직장'에 다니고, 결혼할 뻔 하다가 헤어

진 '옛 애인'이 있고, 결혼을 앞둔 친구를 위해 함께 '마사지 방'을 찾고, '사랑'을 하고 있었기 때문

에, 그 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온갖 따옴표들이 스물 두 살의 내게는 스물 아홉 김봉수 씨를 세

상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를, 어떤 이야기 속의 재미있는 '형 캐릭터'로 인식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와 내 친구들이, 볼록 나온 배를 정장으로 감싸고는 회사에 출근하고, 첫사랑과 결혼을 앞둔

녀석은 가뭄에 콩 나듯 하며 -게다가 안됐다고 동정받거나 능력 없다고 빈축 사기 일쑤다-, 술먹고

는 아직 못 지운 단축번호 1번에 전화를 해 붙잡고 늘어지기도 하고, 이따금, 결혼하는 친구를 위해

업소를 찾기도 하는, 스물 아홉이 됐다.


내 마음속 로맨틱 코미디의 최고봉은 언제나 '미술관 옆 동물원'이었다. 나는 그 영화의 OST를 사춘

기 내내 듣고 다녔고, 이후로도 힘들거나 피곤할 때, 혹은 지나치게 가을을 탈 때마다 백발백중 원

기 회복약으로 그 비디오를 꺼내어 시청하곤 했는데, 올 봄에 일에 치여 다시 꺼내 들었을 때에는 끝

까지 멍-하게만 있었다. 그때엔 이렇게까지 지쳤단 말인가, 하고 생각할 뿐이었는데,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엔딩 크레딧에 혼자 기립 박수를 보낸 지금에 와 돌아보면, 나는 어느 순간에 '미

술관 옆 동물원'을 볼 나이를 지나친 것이다. 하긴 그렇지. 군인이 휴가를 나왔는데, 사귀던 여자는

갑자기 시집을 간다고, 그런데 옛 애인 살던 집에 새로 들어온 여자는 심은하, 휴가가 끝날 때까지

함께 시나리오를 쓰다가 결국 사랑이 이루어진다. 몰입하면 내가 헛산거지.


물론 알고는 있다. 이 영화가 만들어졌을 때의 스물 아홉과, 내 세대의 스물 아홉과는 아직도 심리

적인 나이 차가, 말하자면 현실과의 거리 차가 좀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스물 아홉들도, 별

로, 자기가 어른이 되었다고 명확히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 벌써 어른이 됐나 어쨌나, 슬슬 되어

야 하나 어쩌나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지나간다. 정신 차리고 비교해 보면 스무 살들과는 분명히 다르

긴 한데, 그렇다고 예전에 형들이 스물 아홉이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뭔가 철딱서니 없는 것도 확

실하다. 그래도 좋을까, 싶지만, 안 좋으면 또 어쩔 것이냐,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제야말로, 나

도 아내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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