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공 김수항은 용모가 매우 수려하였다. 일찍이 한 마리 나귀를 타고서는 한 동네를 지나가는데, 역관 집안의
딸이 창문 틈으로 그를 보고서는 마음으로 흠모하게 되었다. 그를 지아비로 삼고자 생각하였지만 입 밖으로 내
기가 어려워, 마침내 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 아비가 캐묻자 딸은 비로소 이유를 말하였다.
아비는 이야기를 다 듣고 김공을 찾아가 인사한 뒤 딸을 거두어 처로 삼아주기를 청하였다. 김공은 성격이 본래
강직하여, 그 딸의 행실이 바르지 못한 것을 크게 질책하였다. 아비는 두려워 벌벌 떨면서 집으로 돌아와 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딸은 그 말을 듣고는 눈물을 삼키며 죽고 말았다.
후에 김공은 대신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탄핵을 받아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유배 몇 년 후에는 마침내 사
약을 받게 되었다. 사약을 받기 전날 밤, 공은 꿈을 꾸었다. 그 딸이 나타나 머리를 산발하고 독기를 품고서는 공
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너는 내게 나쁜 짓을 하였다. 마땅히 이 응보를 받아라."
공은 놀라며 잠에서 깨고는 후회를 하였다고 한다. 홍한주의 <지수염필>에 실린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