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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9

기상이의 생일

나는 전학의 경험이 고작 한 번인, 대단히 행복한 학창시절을 누렸다. 그나마도, 아직까지 우리 가족

내에서 가족사에 있어 가장 큰 경제적 분기로 평가되는 관교동의 아파트 당첨 때문이었으니 하찮은

전학 따위가 아니라 영전 급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 내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휴대폰이나 광대역 통신망은 커녕 SBS의 개국을 앞두고 다 같이 멀티미디어 시대의 개막에 두근거

리던 시절이니, 열 살 언저리의 아이들이 전학을 간 아이와 같이 공부하던 때처럼 연락하고 만날

도리는 없었다. 전학 이전의 친구들과는 그 후 스무 살 언저리에 붐을 이루었던 친구 찾기 싸이트

등을 통해 몇 차례 만났으나 결국 무분별한 혈기로 곤란한 추억만 남겼을 뿐이다.


한 번의 전학부터 지금까지, 신촌에서의 자취나 영종도에서의 군생활을 제하고는 쭉 여기에서 살아

왔다. 그렇기 때문에 맥주의 거품같은 주안을 걷어내고 나면, 관교동은 이십 세 이전의 나에게 거의

모든 것이다. 기상이와는 그 첫 해의 봄에 처음 만났다. 조금 친해지고 난 뒤, 기상이는 자신의 생일

이 3월 1일이니 조금만 빨랐으면 형이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그

때는 그가 전 인생에서 가장 격심한 인기의 가도를 달리던 시절이라,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무척이

나 좋은 인상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친구와 평생을 함께 하고 고민을 나누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

하지 못했다. 어느덧 십칠 년 전의 일이다.


피곤한 심신 탓에 신입생 환영회에서 일찌감치 일어나고 집으로 들어온 어젯밤이었다. 맥주가 배에

가득 찬 탓에 불편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 트림을 끄윽끄윽 해 가며 새벽까지 컴퓨터를 붙잡고 있

다가 밖이 희끄무레해질 무렵에야 침대에 누웠다. 알람을 맞추려고 휴대폰을 보니 3월 1일이라, 일어

나면 축하 문자라도 보내야지 생각하며 잤다. 일어나 보니, 기상이가 입원했다는 홍기의 문자가 와

있었다.


기상이의 가족력은 간이다. 어릴 때엔, 술을 마시면 가장 먼저 얼굴이 붉어지는 것 때문에 그저 놀

림거리로 쓰일 뿐이었다. 하지만 다들 서른을 앞두고 가족력이 무서운 것을 알아가면서, 스스로의 건

강들이 더 이상 좋아지거나 여전한 것이 아니라 차차, 혹은 심각하게 나빠지는 것을 경험하면서부터

함께 하는 친구들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작년의 검사수치는 일반인과 같다고 하여 모두 축하했던 기

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래도 혹 다시 간 문제 때문일까. 옷을 황급히 주워 입으며 홍기에게 전화

를 해 보니, 병명은 간염이라고 했다.


경황이 없어 뻔한 주스를 사 들고 막상 병실에 들어가 보니, 기상이는 의외로 멀쩡해 보였다. 눈과

안색이 노란 것은 간 탓에 입원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랍지 않았다. 앉아서 듣고 보니, 정작

입원한 것은 며칠 전의 일으로, 다른 일로 전화를 한 홍기에게 들통이 나서 모두에게 연락이 돌려진

것이라고 했다. 아무튼 당장에는 퇴원을 기약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하니 마음도 놓이고 하여 한동

안 앉아 환담을 나누었다. 기상이의 어머님은 우리 내의 인기투표에서 아마도 1위를 하실 것이 확

실할 정도로 인기 만점이시지만, 그래도 곁에서 하기 어려운 화제란 있기 마련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를 하다가 바람을 쏘인다는 핑계를 대고 로비로 내려와, 직장 이야기, 여자 이야기, 돈 이야기 등 근

황을 나누다가 문득 헛웃음이 났다. 언제 어른 되나, 언제 어른 되나 노래를 부르고 살지만, 처음 만

났던 것은 십칠년 전, 기상이는 가족력 때문에 환자복을 입고, 나는 방금 감아 붕 뜬 머리에 아저씨

처럼 추리닝과 야구 잠바를 입고, 사회생활의 지난함과 보험수가를 이야기하는 그 모습이. 그 모습을

열두 살의 우리에게 보여주면 어떨까. 서른이구나, 를 서로 인사로 하고 나는 병원을 나섰다.

생일이 지나면, 나이를 먹는다.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그 말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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