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소셜커머스 사이트에서 유행하는 상품 가운데 성인용의 색칠공부가 있다. 어릴 때 갖고 놀던 색칠공부와 똑같다. 바탕에 각각의 색을 칠해야 할 부분이 이미 구분되어 있고 무슨 색을 칠해야 하는지도 표시되어 있다. 거기에 필요한 물감과 굵기 별 붓 세 자루를 더해서 세트로 파는 것이다.
이 상품군이 인기를 끌었던 것인지 등장한 초기에는 그 종류가 심상한 정물화 정도 뿐이었는데 일 년 정도가 지난 지금에는 각종 고전 명화 및 현대미술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한 업체에서 올린 상품군 중에, 내 스마트폰의 단체 채팅방 바탕화면으로 오랫동안 썼을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인 알퐁스 무하의 작품들이 올라왔다.
기왕에 흥미가 있던 차에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 올라왔으니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무하의 여러 작품 가운데 특히 좋아하는 작품인 <JOB담배 광고>를 주문하고, 이 상품을 처음 접해보는 것이기 때문에 시험삼아 먼저 시도해볼 만만한 작품을 하나 골랐다. 그것이 위의 배 그림이다. 특별히 눈길을 잡아끄는 데는 없지만 어릴 적 했던 게임 가운데 가장 즐거운 것 중 하나였던 <대항해시대 2>의 한 장면이 문득 연상되어 구입했다.
시키는대로 칠만 하면 되니 금방 완성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무척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40X50cm의 크기로, 함께 판매되고 있는 상품군 가운데에서 가장 큰 크기이지만 세밀한 표현에 들어가면 가장 얇은 붓으로도 신경 써서 조금씩 칠해나가야만 서로 겹치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거기에다 전체 그림의 여기저기에 분포되어 있는 한 색깔을 다 칠하고 나면 방금 칠한 부분이 어느 정도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또 시간이 갔다.
차라리 그렇게 된 바, 밀려있던 <그것이 알고 싶다>나 <PD수첩>을 틀어놓고는 하루에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씩만 투자하며 느긋하게 진행했다. 손 끝에 집중을 해야 했기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았다. 웅크리고 칠을 하는 탓에 마치고 일어서면 허리가 아팠지만 조금씩 그림의 모양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그렇게 며칠을 투자해서 드디어 완성을 보았다. 가까이서 보면 서툰 붓질 등이 눈에 띄어 별로였지만 벽에 기대어 두고 멀찌감치서 보니 그런대로 봐줄만 했다.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데도 막상 시작할 때에는 그조차 부담스러웠다. 붓을 씻고 물통에 물을 채워오고 자리에 앉고 하는 소소한 일마저 귀찮고 부담스러운 상태에, 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막상 붓을 들어 그려나가다보니 내가 보기에 좀 더 어울릴 것 같은 다른 색을 골라보기도 하고 칠하면서 원래의 모양을 조금씩 수정해 보기도 하는 등 오히려 의욕이 났다. 한 차례 완성을 하고 난 지금에는 대부분의 물감이 반 이상 남은 것을 보고 내가 새 캔버스를 사서 원화를 그려 칠을 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됐다.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일기와 독후감도 좀 쓰고, 겨우내 세워두었던 자전거를 손보아 마실도 나다녀야 하겠다. 생활이 바뀌면 마음도 좀 달라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