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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and the next step

아직 끄떡없다구! 흐흥! 밤을 새우고 난 지금은 아홉시 반입니다. 이정도 가지고는 아직 끄떡없단

말이죠! 겨우 스물셋인데.



혼자 사는 친척형의 집에 놀러 왔다가 의도하지 않게 만화책과 각종 영상물들을 보느라 밤을 새워

버렸습니다. 야, 참 세상에 재미난 만화 많아요.



형네 집은 초등학교와 같은 담을 쓰는 건물에 있습니다. 형이 출근하는 것을 보고 잠시 바람을 쐬려

문을 열었는데, 세상에 삐약삐약 병아리들이 쪼로록 서서 월요일 아침조회를 하고 있더구면요. 장독

대 위에 올라 앉아 사탕을 빨아 먹으면서 그 모냥을 보고 있는데 뒤쪽에 서 있는 애들이 키득거리면

서 절 쳐다보더라고요. 피식 웃다가, 아, 그게 기억이 나더란 말이죠.



2학년때. 1학년이나 3학년때도 아니예요. 정확히 2학년때, 1989년의 봄. 다니던 국민학교(제가 중학

교에 있을때까지도 국민학교였었던 것 같아요.)에서, 2학년은 조회시간에 맨 왼쪽에 섰었단 말이죠.

어느 날인가 런닝셔츠를 입은 아저씨가 학교 옆 아파트의 베란다에 나와서 체조를 하는데 그게

얼마나 웃기고 한편으로는 부러웠던지. 그런데 어느덧 내가 20대의 청년이 되어서 그 자리에 서

있으니. 그리고 십년도 더 지난 그 일을, 그 날의 생각들을 기억해 내다니.



하하. 야, 그것 참. 하하. 밤새우길 잘했다.



조회가 끝나고 아이들은 교실로 주루룩 밀려 들어갔습니다. 문구점 아주머니는 아침에 준비물들을

파느라 지쳤는지 의자 두개를 붙여놓고서는 길게 누우셨고 장독대 옆의 담에서는 고양이가 잡니다.

장면 전체는 커녕 4월의 월요일 아침, 그 햇살 한줄기만큼도 묘사해 줄 수 있는 사진이 없어 아무런

그림도 올리지 않습니다.



(아주 말장난같긴 하지만)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인데 말이죠, 일상이란 매일이 특별해서 얼마나

특별한지 잊고 살게 되는 아주 멋진 날들의 집합이라고.



그리고 적어도 오늘 아침에는,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 피곤하다. 이제 자야지.

4월의 햇살을 받으며 잠들 수 있다니, 정말이지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물론 이 모든 감상이 시험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국문과 3학년이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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