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장마가 한차례 그친 대낮, 땀을 뻘뻘 흘리며 책상 앞에 앉아 번역을 하고 있다가 묵혀 두었던 은행 일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기억해야 할 잡무가 많았기 때문에, 뙤약볕 아래를 걷다가 잊지 않도록 오늘의 할 일
목록을 중얼중얼거리면서 집을 나섰다. 한참 걷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대문 앞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려
고 들고 나갔던 사과 찌꺼기는 그대로 손에 있고 은행 카드는 책상 위에 두고 나온 채였다. 오래전의 만화인 '멋
지다! 마사루'에서 주인공 마사루가 맥주병을 신고 걷고 있다가 옆사람이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같이 놀라며 신발인 줄 알고 신었다고 외치던 장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