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이사를 하고 맞는 첫 토요일의 아침. 지난 한 주간 있었던 일을 기억의 재료 삼아 간단히 정리해두려 한다.
이사 일주일 전. 광명의 이케아 가서 휩쓸어온 가구들이 배송됐다. 그 가운데 혼자서 조립할 수 있어뵈는 것은 미리 좀 해두기로 했다. 손맛도 익힐 겸 스툴부터 조립해봤다.
요런 박스에 담겨있는 것을 까내어 하나하나 맞춰나가고 마침내 완성된 형태의 물건이 나타나면 스스로가 일등 목공이나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연극부 때 무대 만들던 실력 어디 안 갔구만, 하는 개인적인 소회도 덧붙는다. 이것이 패착의 지름길이다.
다음 난이도인 티 테이블에도 도전해본다. 내가 쓸 일은 없고 이따금 방문할 손님용으로 산 것이다. 물건의 크기만 커졌지 조립의 난이도가 올라간 것은 아니지만 그 사실을 통찰하기란 쉽지 않다. 그저, 큰 물건도 잘만 만드는구만! 이때껏 적성을 몰랐었구만! 하는 대견함만 커진다.
이것이 이른바 '이케아 국민책상'이라 불리운다는 HELMER 6단 서랍장. 저렴한 가격에 6단이라는 수납 공간, 그리고 꽤 높은 채도로 쨍 하는 색상 등이 어우러져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이거 뭐, 철판 몇 개 끼우면 되겠네 하고 들러붙었는데 여기서부터 뭔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든다.
완성은 했지만 흐뭇한 미소와 자뻑은 없다. 시간과 노동력을 감안했을 때 이것이 과연 DIY로 할 만한 일이었을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냉장고 옆 선반. 생수와 각종 양념장, 그리고 밥솥 등을 올려놓기 위해 산 물건이다. 수 차례의 욕설과 몇몇 기적 같은 순간을 거쳐 마침내 완성하긴 했다. 그러나 혹 이 제품, 'HEJNE'의 구입을 고려하는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가격 대비 만족도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혼자서 조립할 생각은 하지 마시라고 강권하고 싶다. 이 기둥을 고정시키고 있으면 저쪽 기둥이 빠지고 저쪽 기둥 잡으러 간 사이 이쪽 기둥 빠지고. 덕분에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조립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날 생긴 근육통이 정말로 일주일 갔다.
이사 전 주의 일요일. 일주일 중에 하루 쉬는 사촌형이 와 주었다. 먼저 조립한 것은 이층침대 SVARTA. 좁은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서라는 둥 책장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었다는 둥 등의 핑계를 갖다붙이긴 했지만 그저 한 번은 갖고 싶었을 뿐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 레고를 샀을 때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둘이 하니 일이 확실히 빨랐다. 이번에 내가 샀던 제품들에 한정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이케아의 제품들은 대체로 아귀가 잘 맞는다. 이쯤이면 되겠지 하고 어림짐작으로 나사를 끼워넣으면 대부분 맞아들어간다. 그러니까 조립의 난점은 못이나 나사에 있지 않고 맞는 위치를 잡는 데에 있다. 둘이서 하니 무척 쉬웠다. 셋이나 넷이 붙었으면 훨씬 쉬웠을 것이다. 이케아 가구 조립할 분들은 참고하시라.
안방의 핵심인 책장의 조립. 이 책장은 깊이 30cm, 폭 60cm, 높이 180cm의 FINNBY라는 제품이다. 천장까지의 공간이 많이 남고 뒷판은 조금 두꺼운 하드보드지 정도 두께라 미덥지 않지만, 높이도 더 높고 뒷판도 두꺼운 책장들의 반값 이하라 어쩔 수 없었다. 여남은 개의 책장을 산 터라 개당 만 원만 올라가도 십만 원 씩 올라가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두 면은 빨간 색, 두 면은 검은 색의 책장으로 채웠다. 열두 개를 샀으나 마냥 채워넣을 것이 아니라 동선을 고려해야 한다는 형의 주장에 따라 하나는 밖으로 뺐다.
조립의 과정이 단순해서, 첫 책장을 만들 때엔 삼십 분 가량 걸렸는데 점차 손에 익게 되어 마지막에는 십오 분 이하로 떨어졌다. 형과 나는 녹초가 된 몸인데도 새 박스를 하나 까면 착, 착, 착 하는 분업의 마약에 취해 정신없이 일했다. 즐겁긴 하지만 이게 어찌 보면 노예근성이지, 그러고 보면 분업을 만들어낸 자식이 똑똑하긴 되게 똑똑한 자식이다, 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립을 했다.
일요일이 끝나고 형은 갔다. 나는 수요일의 이사를 앞두고 월, 화요일에 잠깐씩의 짬이 날 때마다 들러 나머지 조립을 이어갔다.
일의 시작 전과 일이 끝난 후에 공구를 가지런히 정리해 놓으면 기분이 좋다. 이런 소소한 재미라도 없으면 일하기가 싫기 때문에 억지로 느끼는 즐거움일 수도 있다.
3단 서랍장과 5단 서랍장. 제품명은 KULLEN이라 한다. 이 또한 동종의 카테고리 내에서 가장 저렴한 서랍장이다. 3단은 재미난 팟캐스트 하나 틀어놓고 조금 낑낑대면 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땀 흘리지 않고 5단을 조립하려는 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삿날 아침. 주워와서 잘 썼던 좌식의자도 내 놓고.
오래 살았는데도 낯선, 처음 집을 둘러볼 때나 보았던 텅 빈 방의 모습.
창문으로는 학교 뒷산인 무악산이 보인다. 서른 넘어 오 년 가량 살았던만큼 많은 영욕을 함께 하였던 방이다. 스무 살부터 살아왔던 신촌에서의 마지막 방이기도 하다. 앉아서 차라도 한 잔 마시며 지나간 시절을 떠올려보면 좋겠지만 마치 노래 가사에 나오듯 창 밖에서 이삿짐 아저씨의 클랙션 빵빵 소리가 들려온다. 내 아버지보다 윗 연배인 것 같은 기사님들이 가쁜 숨 내쉬며 짐 나른 것을 보고난 터라 소회를 위해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대부분 그랬던 것 같다. 가슴 졸이며 기다렸던 긴 시간에 비해 정작 중요한 순간 자체는 덤덤하게, 특별할 것 없이 휙 하고 지나간다. 당연한 일인데도 겪을 때마다 새롭다.
이사는 잘 끝났다. 대강의 정리는 끝났지만 인천 본가에서의 짐이 또 한차례 올라올 예정이라 완전히 정리가 끝나면 사진을 찍어 올리려 한다. 이사일은 서른다섯 살의 생일이었다. 며칠 뒤, 생일을 기억해준 제자들이 선물도 사주고 케잌도 사주었다. 맛은 이사를 마치고 사먹은 치킨이 훨씬 나았지만 마음은 이쪽이 분명히 더 기뻤다. 고맙다.
이사를 앞두고 바쁜 걸음으로 이곳저곳을 오가다 보았던 장면이다. 새 집으로의 이사가 삼십 대의 실버 라이닝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찍었다. 구름 너머에는 밝은 날이 있겠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