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사이 사진이 너무 없어 뭐 올릴 만한 것이 없을까 뒤지다가 휴대폰 사진 폴더에서 가져왔다.
지난 번 일기에도 적었듯이 서툰 실력으로 휴대폰 메모리의 사진들을 컴퓨터로 옮기는 와중에 여러
장의 사진을 날려 먹었는데, 남은 것을 확인하고 크게 안도한 추억들 중 하나. (엉뚱한 꽃사진들은
모두 살아 남았다.) 나중에 구세현 양이 졸업하거나 시집 갈 때쯤 인화하여 슬쩍 건네면 천금에 값
할 선물이 되리라 여겨 아껴두려 했는데, 근래에 쪽지로 이 곳으로 초대한 일이 있어 와서 보고 놀
라라고 새해 세뱃돈 삼아 올려둔다.
극화하고 연출하여 2007년 3월에 무악극장에서 상연하였던 '라디오의 시간' 1장의 마지막 장면. 원작
의 열일곱 명을 열세 명까지 정리했는데도 캐스트가 부족했기 때문에 당시 신입생이었던 구세현양
(21)을 긴급 투입하여 고작 며칠만의 연습 뒤에 올려보낸 것이라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세현 양은 지
켜보던 내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다. 그 순간을 어떻게든 간직하고 싶어
찰칵 소리가 날 것을 감수하고라도 오퍼실에서 음향을 조절하는 와중에 찍었던 한 컷. 휴대폰의 카
메라라 화질은 형편 없지만, 이 한 장으로도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아, 나의
지은씨.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연출로서 기억하는 김지은 역 구세현 양의 최고의 연기가 또 한 장면 있다.
그 연기를 보고 나는 2002년 최빛나 양에게서 받은 충격 이후 최초로 후배를 보며 함께 무대에 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디렉션은 간단했다. 그저 밖에서 들어와 무대 하단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몰래 그들의 뒤를 지나
무대 상단으로 숨어 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사실 극의 흐름상 연기로서 긴장감을 유발시키면 더
좋았겠지만 막판에 주연급 배우들의 연기 조율에 힘이 부쳐 거기까지는 주문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세현 양이 무대에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나는 아, 참, 안타깝다, 이 장면도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의도를 더 설명해 줄 수 있었을텐데, 이 장면이 갖는 의미를 설명해 줄 수 있었을텐데, 하고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보라! 세현 양은 등장을 하더니 일단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과감한 액션
으로 관객의 이목을 끌어 모으고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양 손에 챙겨 든 뒤 상체를 있는 힘껏 구
부린 채로 폴짝폴짝 뛰어 달아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연이어 두개의 느낌표, 이전부터 나의 일기를
읽어 오신 분이라면 여기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감정의 강도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보지 못
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고, 본 사람이라 해도 연출만이 느끼는 격렬한 감동에는 미치지 못 할 것이
다. 예산이 부족해 바닥은 부직포 한 장 못 깐 맨바닥이었고, 연기연습은 길어봐야 1주일, '몰래 들어
가라'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디렉션도 주지 않았는데, 이 놀라운 표현력이라니. 나는 김지은 역에 세
현 양을 내려주신 무악극장의 신에게 무한한 감사를 올렸다. 오, 나의 지은씨.
받을 대상을 애초에 정해 놓고 편지형식으로 쓰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일기를 쓸 때에는 보통 그 내
용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도 대강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쓰려 노력하는데, 그날의 기억을 더
듬으며 흥분하다 보니 오늘의 일기는 결국 그저 세현 양과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추억담이 되고 말았
다. 쓰면서도 아슬아슬했고 쓴 뒤에 읽어 보면서도 역시 정신 놓고 썼구나, 싶지만 나의 지은씨를
위해 이 정도의 호사는 베풀어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총애하는 세현 양에게 보내는 연서
戀書 삼아 여기에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