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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0

근황을 적는다

요새는 글도 그림도 마음처럼 나오질 않는다. 매일같이 일기를 썼다 지웠다 하다가, 생각나는대로 근

황을 적는다.



- 영화 '셜록 홈즈'를 봤다. 오랜만에 다시 접한 가이 리치의 영상은 반가웠지만, 원작인 소설과 닮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편의 이야기로서 지루한 영화라는 것이 문제여서, 오랜만에 찾은 영화관

이라 두근두근했음에도 클라이막스에서 숙면하고 말았다. 나는 대단히 관대한 셜로키언이라 저 장면

이 틀렸느니 저 설정이 틀렸느니 하는 데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주드 로의 왓슨 캐릭터 메

이킹은 정말 빗나갔다고 생각한다.



- 시간을 들인 '셜록 홈즈'가 파울이었기 때문에, 아이맥스로 '아바타'를 보기로 했다. 정상적인 시

간에는 도저히 예매를 할 수가 없지만 새벽 두 시에는 빈 자리가 꽤 있었다. 다음 주 중의 평일을

골라 가장 좋은 아이맥스 시설을 갖추었다는 왕십리 CGV에 다녀올 생각이다. 본 사람들의 평은 극

찬 일색이다. 과연 그럴까?



- 연말에 소복해진 통장을 빌미 삼아 그간 벼르고 벼르던 레고 기차를 주문했다. 자신의 소비에 대

해 항상 일말의 부끄러움을 갖는 나는 뭔가 비싼 기호품을 살 때마다 그 가격에 대해 '천인공노할'

이라는 표현을 종종 쓰는데, 이번에는 그야말로 만인이 일시에 진노하여도 드릴 말씀이 없는 행각을

벌였다. 논문을 쓰는 중에 사람은 종종 미친 짓을 한다, 는 고래의 격언을 적어두고 넘어간다.



- 뜻하지 않게 몇 만원의 알라딘 적립금이 생겨서, 제 돈 주고는 못 사고 침만 바르던 프랭크 밀러의

'신 시티' 1권과 마츠모토 타이요의 '죽도 사무라이' 2권을 샀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가장

아름다운 예술은 현실을 독창적으로 왜곡하고 재구성하여 그 간극을 음미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

하는 나로서는, 두 천재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것을 감사하게 만드는 독서 경험이었다.

영화 '신 시티'를 보며 로베르토 로드리게즈를 '스파이 키즈'나 만드는 감독으로 보아서는 안 되겠

다 몇 번이나 생각했었는데, 원작을 읽고 나서야 충실한 재현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신 시티'

2는 올해 말에 제작에 들어간다고 한다. 아마도 안 나올 것이 확실한 '오스틴 파워즈' 4편을 제하면,

가장 기대되는 속편이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 가운데 가장 즐겁게 읽고 있는 '죽도 사무라이'는 1권에 이어 2권도 비명 나

오도록 아름다운 한 장 한 장이었다. 아침에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을 것이다.



- 앞의 두 권과 함께 산 오노 나츠메의 'Danza'는 기대보다 영 별로였지만 초회판 한정의 마우스 패

드가 함께 왔다. 오노 나츠메를 선물할 만한 사람이 주위에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 며칠에 걸쳐 시트콤 'The Office' 시리즈를 모두 보았다. 내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영화인 '브루

스 올마이티'의 인상적인 주연에서부터 언제나 재미있는 캐릭터인 '겟 스마트'의 덜떨어진 비밀 요

원까지 항상 그 연기를 지켜보는 것이 즐거운 배우인 스티브 카렐이 메인 롤을 맡고 있었다. 알고 보

니 유명한 시리즈였고, 개성적이어서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그들간의 충실한 관계 설정, 그리고 편마

다 가득한 유머에는 누구나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겠지만, 순간적인 착상과 뒤를 고려하지 않

는 폭발개그를 인생의 주요한 덕목으로 삼는 국대급 B형으로서는 오랜만에 열광할 만한 작품이었다.



- 어른들과 있을 때엔 새침한 표정으로 얌전하게 있다가, 둘만 남게 되면 아무 이유 없이 갑작스레

내 불알을 걷어차곤 하던 어린 시절의 옆집 이웃 백은미가 시집을 갔다. 이십삼년 전의 내게 언젠

가 백은미가 시집을 갈 것이고 서른이 된 내가 그 사실을 덤덤하게 축하해 주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

면, 유년의 최대호는 경악과 분노라는 성인적 감정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습득하게 될 것이다.  



- 안식년을 끝내고 돌아온 지도교수님으로부터 1년 내에 석사 논문과 관련된 모든 일정을 끝내라는

통고를 받았다. 큰 충격을 받고, 올해는 서당을 휴학할까 생각중이다.



- 패닉룸의 영원한 그녀 권미랑 님이 2세 계획 원년에 장타 날리셨다. 선진 성지식을 전파해 주면

눈망울을 빛내면서도 싫은 듯 비명을 지르던 스무 살 그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녀는 어느덧 임신의

과정을 자상히 일러주는 어머님이 되었다. 크리스마스에 보라카이에서 생겨난 조카. 삼촌은 개 혓바

닥도 늘어지는 늦여름 인천에서 태어났는데도 이토록 격심한 로맨티스트가 되었는데, 그 미래가 어

찌 될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아무튼 권 어머님. 엎드려 감축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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